1784년 慶尙道 榮川郡의 迃溪書院 사림이 豊基郡 출신의 유학자 郭𡺽을 祭享하는 일로 도내 여러 사림에게 의견을 묻고 협조를 구하고자 발급한 通文
丙午十二月始 雜錄
자료의 내용
1784년(정조 8) 慶尙道 榮川郡의 ?溪書院 사림이 도내 여러 향교와 서원에 발급한 通文이다. 이 통문은 慶尙道 豊基郡 豊基鄕校에 소장되어 있는 『丙午十二月始 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풍기향교에는 모두 4책의 잡록이 전하고 있는데, 본 잡록은 풍기향교 관련 기록이 아니라, 白皐里社의 잡록이다. 본문에 발급 연도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데, 이 통문 바로 앞에 수록된 1786년(정조 10) 12월 기사에 따르면, 풍기군 출신의 유학자 丹谷 郭??[1568~1633]을 祭享하는 일로 1784년 오계서원 측이 통문을 발급했다는 기록이 있어, 작성 연도를 1784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결국 1786년 12월 곽진을 제향하는 백고리사가 풍기군에 설립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통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통문에서는 먼저 좋은 덕행은 떳떳한 충정에서 나오고, 先賢을 崇奉하는 것은 실로 사림의 책임이라고 하였다. 이어 丹谷處士 곽진 선생이야말로 巖穴 사이의 ‘特立之士’라고 하면서 그의 행적을 소개해 놓았다. 곽진은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향촌에 은거하면서 학문 연구에 주력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의병을 일으켰으며, 奸臣이 권력을 擅斷할 때에는 상소문을 올려 항거했다고 한다. 여기서 간신은 光海君 연간에 활동했던 李爾瞻을 뜻하는데, 곽진은 1621년(광해군 13) 동료들과 함께 이이첨을 참수하라는 상소문을 올린 적이 있었다. 이러한 곽진의 행적에 대해 통문에서는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한쪽 손으로 강과 바다가 橫流하는 형세를 막는 것과 같다고 하며, 忠君愛國의 정성과 慷慨激烈의 기세는 천지를 지탱하는 기둥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곽진은 평소 『心經』, 『近思錄』, 『朱子語類』 등의 서적을 講究하고 硏精한 까닭에 일생 동안 갖춘 일은 모두 스스로 학문을 얻어 나간 것이고, 또 文章이 汪洋하여 마치 큰 파도가 출몰하는 것과 같다면서, 그의 학문을 높게 평가하였다. 덧붙여 나머지 행적은 師友錄에 있다고 소개해 놓았다. 이와 같이 곽진의 행적과 학문을 평가 한 뒤에는 옛날 사람 가운데 道學·문장·氣節이 있으면 立享하여 추숭하였는데, 곽진은 이 세 가지를 겸비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그의 ‘桑梓之鄕’에도 ?享하는 곳이 없으니, 지금 우리 영남의 사림들이 모두 개탄하며 억울해 하는 바라고 하였다. 그래서 齊會하는 날에 士論이 크게 일어나, 여러 군자들에게 곽진 제향과 관련된 의견을 묻고 동의를 구하게 되었다며, 통문의 발급 경위를 밝혀 놓았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선현을 제향하는 院祠의 설립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 무렵 추모 시설인 서원·사우의 설립과 선현의 제향은 사림의 공론에 의거해 결정되었다. 곽진은 풍기군 출신의 유학자인데, 그를 제향하는 사우를 설립하기 위하여, 인근 영천군의 오계서원 사림이 도내 여러 향교와 서원에 본 통문을 발급한 것도, 곽진 제향이 사림의 공론에 의거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