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의 내용
慶尙道 豊基郡 豊基鄕校에 소장되어 있는 『丙午十二月始 雜錄』의 1786년(정조 10) 12월 기사이다. 풍기향교에는 모두 4책의 잡록이 전하고 있는데, 본 잡록은 풍기향교 관련 기록이 아니라, 白皐里社의 것이다. 풍기향교에는 모두 4책의 잡록이 전하고 있는데, 본 잡록은 풍기향교 관련 기록이 아니라, 白皐里社의 것이다. 1786년 12월 기사에서는 풍기군 출신의 학자 丹谷 郭??[1568~1633]을 祭享하는 백고리사의 설립 경위와 과정을 소개해 놓았다. 이와 관련하여 기사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단곡 곽진을 제향하는 일로 道內 공의가 일어났었으나, 여러 해 동안 진척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지난 1784년(정조 8) 봄 榮川郡의 ?溪書院에서 道會가 개최되었는데, 많은 사림들이 아직 곽진을 祭社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한 목소리로 분개했다고 한다. 이에 順興都護府 소재의 향교와 書院이 적당한 시기에 곽진을 경건하게 모시자는 의견으로써 通文을 발급하였다. 순흥도호부는 곽진이 만년에 머물렀던 고을이다. 또한 安東府 三溪書院에서도 같은 사유로 통문을 보내왔다.
그 후 순흥도호부 사림이 곽진의 杖?所인 一浮石의 檜石書堂에다 사당을 건립하는 일로써 鄕會를 열었으며, 甁山 金鸞祥[1507~1570]의 竝享을 논의하였고, 며칠 이내로 營建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財力을 모으는 일로 本洞 사림 간에 갈등이 발생해 중간에 정지되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풍기군의 士論이 다시 준발하여, 지난 1786년(정조 10) 4월 郁陽書院 居接 때 鄕員老少가 일제히 사당을 세우는 것으로 의논을 모았고, 이와 관련하여 통문을 발급하였다. 그리고 이때 합의한 完議를 게시하였으며, 有司로 선발된 南泰一·黃洙源에게 재물을 모으는 임무를 맡겼다. 풍기향교·욱양서원·愚谷書院·敬老所에서 각각 추수한 곡물을 받아 확보하고, 내년을 기다렸다가 제향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제향을 기다리는 동안 유사가 郭必厚·黃復源으로 교체되었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1786년 12월 13일 일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하여, 3소의 임원인 풍기향교 都有司 黃欽大, 掌議 南衡度, 욱양서원 院長 生員 南泰鎭, 齋任 黃潤五·韓德峻, 우곡서원 원장 黃潤國과 鄕中 諸員이 의논을 모아 歲前에 곽진을 제향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뜻을 담은 통문을 고을에 발급하였다.
12월 17일 욱양서원에서 鄕會를 개최하였는데, 참석한 회원이 70여인에 이르렀다. 사세가 난처해져 급히 때에 맞추어 廟를 세우기 위하여, 靈田 黃氏의 舊廟와 屋子를 사두어 奉安하는 장소로 삼았고, 26일을 吉한 날로 정해 거행하기로 하였다. 이때 班首는 權重崙, 公事員은 黃任大·黃潤德, 都執禮는 黃最源, 都廳은 河龍德·黃洙源, 都辦은 李益彬·李垠, 製通은 黃泗源·柳尙潤, 寫通은 河龍吉·黃霖漢·黃中敬이 각각 맡았다. 奉安祝文은 禮安縣 사람으로 掌令을 지낸 李級[1721~1790]과 儒生 李師錫에게 청하였다. 이때 魯溪書堂 儒生들이 秋月堂 韓山斗[1556~1627]를 병향하는 일로써 통문을 보내왔고, 이어서 下里에서도 같은 뜻으로 통문을 보내왔다. 곧 고을에서 의견을 모았으나 卜日에 이르러 노계서당의 통문이 왔으니, 형세 상 병향할 수 없기에, 연고가 있는 장소에 별도로 제향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으로 답통하였다.
18일 都廳·都辦 등 諸員이 본소에 유숙하며 다스려야 되는 各項의 여러 가지 일을 정한 다음, 그 일을 유사와 하인에게 배정하였다. 묘우와 垣墻의 頹?한 곳을 찾아 修葺하기 시작하였다. 23일 임원을 청하는 일로 일제히 내회하였다. 24일 안동부 進士 金汝弼과 순흥도호부 사림 李元會·李慶會, 영천군 사림 權若魯, 그리고 본향의 사림 수십 원이 와서 유숙하였다. 부탁한 祝文을 예안현 사림 李鎭石이 가지고 왔다. 25일 廟號와 社號를 적어 주기를 수령에게 청하였다. 이때 보내 준 묘호는 崇賢祠이며, 사호는 백고리사였다. 글씨가 심히 정건하였는데, 당시 豊基郡守는 李大永이었다. 陶山書院에서 통문을 보내왔는데, 유생이 오지는 않았다. 제향하는 일로 도회가 열렸는데, 수 백인이 참석하였다. 공사원은 순흥도호부 士人 安恂과 본읍의 黃泗源, 都執禮는 黃任大, 社長은 안동부의 진사 金汝弼, 齋任은 李師錫·黃復源이 맡았다. 이날 오후 위판에 먹으로 제향자의 이름을 썼는데, 寫版儒生은 安必誠이었다. 그리고 위판을 大廳에다가 權安하였다. 도회에서 고려조 版圖正郞을 지낸 秦中吉[1308~?]을 入享하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는 의논이 있었다. 또한 魯溪의 杖?所에서 곽진을 한산두와 병향하는 일로 통문을 발급하였다. 오는 28일에 卜吉하기로 결정하였다.
26일 묘시 묘내에 위판을 봉안하였고, 禮成祭를 거행하였다. 初獻官은 사장 김여필, 亞獻官은 校長 황흠대, 終獻官은 순흥도호부의 龜灣書院 원장 金燦東, 그 외 大祝 黃最源, 贊者 黃潤德, 謁者 黃碩?, 贊引은 영천군 士人 權若魯와 순흥도호부 士人 朴弘圭, 門外執禮는 순흥도호부 사인 金尙洛, 東唱 郭師楷, 西唱은 李政?, 奉香은 순흥도호부 사인 金尙瀅, 奉爐 南衡度, 司尊은 순흥도호부 사인 黃志寬과 본읍의 金龍正, 奉爵은 순흥도호부 사인 安應晦와 본읍의 黃霖漢, 陳設은 李時?·李遂陽과 안동부 사인 李澈祚, 본읍의 金思玉·河必淸이 각각 맡았다.
祭物은 四?·四豆로 하였으며, 희생으로 쓰는 닭과 벼·기장은 도의 유림들이 支供해 주었다. 蔬菜·油漿은 鳴鳳寺와 雙岳寺의 승려들에게 돈을 주고 사 들였다. 炊飯은 毘盧寺 승려가 朝食堂을 담당하였다. 社長과 齋任이 遞差를 청하였기에 사장을 三薦하였는데, 首薦은 黃潤德, 亞薦은 黃最源, 末薦은 李世檍이었다. 堂中이 圈點하여 수천을 선발하였다. 齋任은 金孝源·黃霖漢을 수천하였다. 당중에서 의논을 모아 享禮는 3월과 9월 中丁일에 거행하기로 하였으며, 선비를 선발해 院錄에다가 移書하였다. 향례 때 헌관 3인, 집사 6인을 뽑되, 出文하여 의논하기로 하였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사림의 공론에 의해 先賢이 서원 또는 사우에 제향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는 기사이다. 본 기사에는 곽진을 제향하는 백고리사가 풍기군·순흥도호부·영천군 지역 사림의 공론에 의해 설립되었음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림들은 도회를 개최하거나 통문을 발급하여, 제향에 대한 의견 수렴과 협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한편, 제향 때 소용되었던 물력 가운데서는 사림의 기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선현 제향에 사림의 공론이 중요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사찰을 통해 물적·인적 자원이 마련되고 있는 것도 주목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