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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榮州)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백고리사(白皐里社) 『병오12월시 잡록(丙午十二月始 雜錄)』 수록 1786년 12월 기사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XG.1786.4721-20180630.Y1821907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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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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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치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왕록
작성주체 백고리사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작성시기 1786
형태사항 크기: 24.5 X 25
수량: 5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주 풍기향교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관련자료

안내정보

영주(榮州) 풍기향교(豊基鄕校) 소장 백고리사(白皐里社) 『병오12월시 잡록(丙午十二月始 雜錄)』 수록 1786년 12월 기사
1786년(정조 10) 12월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豊基郡)백고리사(白皐里社)가 설립되는 경위와 과정을 기록해 놓은 기사이다. 백고리사풍기군 출신의 유학자 단곡(丹谷) 곽진(郭??)[1568~1633]을 제향(祭享)하였던 사우인데, 이 기사는 풍기향교(豊基鄕校)에서 엮은 『병오12월시 잡록(丙午十二月始 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풍기향교에는 모두 4책의 잡록이 전하는데, 본 잡록은 풍기향교 관련 기록이 아니라 백고리사의 것이다.
본 기사에는 풍기군에서 곽진 제향과 관련된 논의가 오래전부터 있어 왔으며, 이에 풍기군을 비롯해 인근 고을의 사림들이 의견을 모아 1786년 12월 곽진을 제향하는 백고리사를 설립하게 된 경위와 과정이 소개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풍기군 사림들은 도회(道會)를 개최하거나, 통문(通文)을 발급하여 곽진 제향과 관련된 의견을 수렴하거나, 협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조선후기 서원과 사우 같은 선현(先賢)의 추모 시설이 사림 공론에 의거해 설립되었음을 보여준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상세정보

1786년 12월 慶尙道 豊基郡 사림이 郭𡺽을 祭享하는 白皐里社를 설립하는 경위와 과정을 기록해 놓은 기사
丙午十二月始 雜錄
자료의 내용
慶尙道 豊基郡 豊基鄕校에 소장되어 있는 『丙午十二月始 雜錄』의 1786년(정조 10) 12월 기사이다. 풍기향교에는 모두 4책의 잡록이 전하고 있는데, 본 잡록은 풍기향교 관련 기록이 아니라, 白皐里社의 것이다. 풍기향교에는 모두 4책의 잡록이 전하고 있는데, 본 잡록은 풍기향교 관련 기록이 아니라, 白皐里社의 것이다. 1786년 12월 기사에서는 풍기군 출신의 학자 丹谷 郭??[1568~1633]을 祭享하는 백고리사의 설립 경위와 과정을 소개해 놓았다. 이와 관련하여 기사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단곡 곽진을 제향하는 일로 道內 공의가 일어났었으나, 여러 해 동안 진척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지난 1784년(정조 8) 봄 榮川郡?溪書院에서 道會가 개최되었는데, 많은 사림들이 아직 곽진을 祭社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한 목소리로 분개했다고 한다. 이에 順興都護府 소재의 향교와 書院이 적당한 시기에 곽진을 경건하게 모시자는 의견으로써 通文을 발급하였다. 순흥도호부곽진이 만년에 머물렀던 고을이다. 또한 安東府 三溪書院에서도 같은 사유로 통문을 보내왔다.
그 후 순흥도호부 사림이 곽진의 杖?所인 一浮石檜石書堂에다 사당을 건립하는 일로써 鄕會를 열었으며, 甁山 金鸞祥[1507~1570]의 竝享을 논의하였고, 며칠 이내로 營建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財力을 모으는 일로 本洞 사림 간에 갈등이 발생해 중간에 정지되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풍기군의 士論이 다시 준발하여, 지난 1786년(정조 10) 4월 郁陽書院 居接 때 鄕員老少가 일제히 사당을 세우는 것으로 의논을 모았고, 이와 관련하여 통문을 발급하였다. 그리고 이때 합의한 完議를 게시하였으며, 有司로 선발된 南泰一·黃洙源에게 재물을 모으는 임무를 맡겼다. 풍기향교·욱양서원·愚谷書院·敬老所에서 각각 추수한 곡물을 받아 확보하고, 내년을 기다렸다가 제향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제향을 기다리는 동안 유사가 郭必厚·黃復源으로 교체되었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1786년 12월 13일 일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하여, 3소의 임원인 풍기향교 都有司 黃欽大, 掌議 南衡度, 욱양서원 院長 生員 南泰鎭, 齋任 黃潤五·韓德峻, 우곡서원 원장 黃潤國과 鄕中 諸員이 의논을 모아 歲前에 곽진을 제향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뜻을 담은 통문을 고을에 발급하였다.
12월 17일 욱양서원에서 鄕會를 개최하였는데, 참석한 회원이 70여인에 이르렀다. 사세가 난처해져 급히 때에 맞추어 廟를 세우기 위하여, 靈田 黃氏의 舊廟와 屋子를 사두어 奉安하는 장소로 삼았고, 26일을 吉한 날로 정해 거행하기로 하였다. 이때 班首는 權重崙, 公事員은 黃任大·黃潤德, 都執禮는 黃最源, 都廳은 河龍德·黃洙源, 都辦은 李益彬·李垠, 製通은 黃泗源·柳尙潤, 寫通은 河龍吉·黃霖漢·黃中敬이 각각 맡았다. 奉安祝文은 禮安縣 사람으로 掌令을 지낸 李級[1721~1790]과 儒生 李師錫에게 청하였다. 이때 魯溪書堂 儒生들이 秋月堂 韓山斗[1556~1627]를 병향하는 일로써 통문을 보내왔고, 이어서 下里에서도 같은 뜻으로 통문을 보내왔다. 곧 고을에서 의견을 모았으나 卜日에 이르러 노계서당의 통문이 왔으니, 형세 상 병향할 수 없기에, 연고가 있는 장소에 별도로 제향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으로 답통하였다.
18일 都廳·都辦 등 諸員이 본소에 유숙하며 다스려야 되는 各項의 여러 가지 일을 정한 다음, 그 일을 유사와 하인에게 배정하였다. 묘우와 垣墻의 頹?한 곳을 찾아 修葺하기 시작하였다. 23일 임원을 청하는 일로 일제히 내회하였다. 24일 안동부 進士 金汝弼순흥도호부 사림 李元會·李慶會, 영천군 사림 權若魯, 그리고 본향의 사림 수십 원이 와서 유숙하였다. 부탁한 祝文을 예안현 사림 李鎭石이 가지고 왔다. 25일 廟號와 社號를 적어 주기를 수령에게 청하였다. 이때 보내 준 묘호는 崇賢祠이며, 사호는 백고리사였다. 글씨가 심히 정건하였는데, 당시 豊基郡守李大永이었다. 陶山書院에서 통문을 보내왔는데, 유생이 오지는 않았다. 제향하는 일로 도회가 열렸는데, 수 백인이 참석하였다. 공사원은 순흥도호부 士人 安恂과 본읍의 黃泗源, 都執禮는 黃任大, 社長은 안동부의 진사 金汝弼, 齋任은 李師錫·黃復源이 맡았다. 이날 오후 위판에 먹으로 제향자의 이름을 썼는데, 寫版儒生은 安必誠이었다. 그리고 위판을 大廳에다가 權安하였다. 도회에서 고려版圖正郞을 지낸 秦中吉[1308~?]을 入享하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는 의논이 있었다. 또한 魯溪의 杖?所에서 곽진한산두와 병향하는 일로 통문을 발급하였다. 오는 28일에 卜吉하기로 결정하였다.
26일 묘시 묘내에 위판을 봉안하였고, 禮成祭를 거행하였다. 初獻官은 사장 김여필, 亞獻官은 校長 황흠대, 終獻官은 순흥도호부龜灣書院 원장 金燦東, 그 외 大祝 黃最源, 贊者 黃潤德, 謁者 黃碩?, 贊引은 영천군 士人 權若魯순흥도호부 士人 朴弘圭, 門外執禮는 순흥도호부 사인 金尙洛, 東唱 郭師楷, 西唱은 李政?, 奉香은 순흥도호부 사인 金尙瀅, 奉爐 南衡度, 司尊은 순흥도호부 사인 黃志寬과 본읍의 金龍正, 奉爵은 순흥도호부 사인 安應晦와 본읍의 黃霖漢, 陳設은 李時?·李遂陽안동부 사인 李澈祚, 본읍의 金思玉·河必淸이 각각 맡았다.
祭物은 四?·四豆로 하였으며, 희생으로 쓰는 닭과 벼·기장은 도의 유림들이 支供해 주었다. 蔬菜·油漿은 鳴鳳寺雙岳寺의 승려들에게 돈을 주고 사 들였다. 炊飯은 毘盧寺 승려가 朝食堂을 담당하였다. 社長과 齋任이 遞差를 청하였기에 사장을 三薦하였는데, 首薦은 黃潤德, 亞薦은 黃最源, 末薦은 李世檍이었다. 堂中이 圈點하여 수천을 선발하였다. 齋任은 金孝源·黃霖漢을 수천하였다. 당중에서 의논을 모아 享禮는 3월과 9월 中丁일에 거행하기로 하였으며, 선비를 선발해 院錄에다가 移書하였다. 향례 때 헌관 3인, 집사 6인을 뽑되, 出文하여 의논하기로 하였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사림의 공론에 의해 先賢이 서원 또는 사우에 제향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는 기사이다. 본 기사에는 곽진을 제향하는 백고리사풍기군·순흥도호부·영천군 지역 사림의 공론에 의해 설립되었음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림들은 도회를 개최하거나 통문을 발급하여, 제향에 대한 의견 수렴과 협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한편, 제향 때 소용되었던 물력 가운데서는 사림의 기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선현 제향에 사림의 공론이 중요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사찰을 통해 물적·인적 자원이 마련되고 있는 것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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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丙午十二月始雜錄

丹谷先生立享事道內公議之發已多年數而?此未
遑矣去甲辰榮川?溪書院有道會事會中多
士以先生之?未祭社齊聲慨然卽發通于順興校院
以爲?時揭虔之議蓋爲邑卽先生晩年棲息之鄕
也其後安東三溪書院通文又繼到邑士林卽定鄕
會以先生杖?所立祠事發文于一浮石檜石書堂
與議竝享甁山金先生而以爲不日營建之事矣本洞士林以
財力事議多矛循且有繼發紛?之端仍爲中停故本
鄕士論於是峻發丙午四月日郁院居接時鄕員老少齊
會以此意預爲發文爲定敬老大鄕會敦定立社之議
卽揭完議請定出鳩財有司二員南泰一黃洙源自鄕
校兩書院敬老所議出別備秋收一年穀物待後年爲
始事計矣其後前定兩有司有事呈單代出郭必厚

黃復源
其年冬有事機之不可延拖者十二月十三日三所任員合
席校中都有司黃欽大掌議南衡度郁陽院長生員
南泰鎭齋任黃潤五韓德峻愚谷院黃潤國鄕中
諸員亦來會以歲前立享之意發文鄕中
十七日鄕會于郁陽書院會員至七十餘人事出取買急遽
勢難及時創廟買取靈田黃氏舊廟及屋子爲奉
安之所以二十六日卜吉定行班首權重崙公事員
黃任大黃潤德都執禮黃最源都廳河龍德黃洙
都辦李益彬李垠製通黃泗源柳尙潤寫通
龍吉
黃霖漢黃中敬請奉安祝文於禮安李掌令級
儒生李師錫魯溪書堂儒生以秋月堂韓先生竝享
事發通來到下里通文亦以是繼到卽收議鄕中僉
議以爲此事則經紀有年已至卜日魯溪通文則事出
急遽勢有所不得竝享而各其杖?所設享事甚便
好以本堂入享之意答通
十八日都廳都辦諸員留宿本所經紀請般事排定各項
有司及下人廟宇垣墻頹?處始爲修葺
二十三日主辦請任員一齊來會

二十四日安東進士金汝弼順興士林李元會李慶會
榮川士林權若魯及本鄕士林數十員來宿禮安請祝
儒生受奉安文來到禮安士林李鎭石來會
二十五日廟號及社號請題寫于主?官卽書出祠號
崇賢祠社號則白皐里社筆甚精健矣主?卽
李大永陶山通文來到而以儒生之不得起送通告道會
之員至數百餘人公事負順興士人安恂及本邑黃泗源
執禮黃任大社長安東進士金汝弼齋任李師錫黃復
午後題位版寫版儒生安必誠權安于大廳道議以
版圖正郞秦公中吉之送未立享爲恨亦以魯溪
杖?所發文于魯溪韓秋月竝享事卜吉于今二十八

二十六日卯時奉位版于廟內因行禮成祭初獻官社長金汝
亞獻官校長黃欽大終獻官順興龜灣書院院長金燦東
大祝黃最源贊者黃潤德謁者黃碩?贊引榮川士人
權若魯順興士人朴弘圭門外執禮順興士人金尙洛東唱郭
師楷西唱李政?奉香順興士人金尙瀅奉爐南衡度
順興士人黃志寬本邑金龍正奉爵順興士人安應晦
本邑黃霖漢陳設李時?李遂陽安東士人李澈祚

金思玉河必淸
祭物四?四豆牲鷄稻黍道儒支供蔬菜油漿則鳴鳳雙岳
寺僧處給價貿用炊飯則毗盧{田+盧}寺僧擔當朝食堂社長及齋
任請遞社長備三薦首薦黃潤德亞薦黃最源末薦李世
堂中圈點準事首薦齋任金孝源黃霖漢收議堂中
享禮用三九月中丁定行
取士則院錄移書
享禮時執事則三獻官六執事出文事定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