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0년 慶尙道 豊基郡의 白皐里社 還安禮 거행과 安德麟 追享 관련 기사
丙午十二月始 雜錄
자료의 내용
1790년(정조 14) 慶尙道 豊基郡에 소재했던 白皐里社의 還安禮 거행 경위와 沙村 安德麟[1563∼1609]의 追享 경위를 기록해 놓은 기사로 豊基鄕校에 소장되어 있는 『丙午十二月始 雜錄』에 수록되어 있다. 풍기향교에는 모두 4책의 잡록이 전하고 있는데, 다른 3책은 풍기향교 잡록이지만, 이 잡록은 백고리사의 것이다. 백고리사는 풍기군 출신의 유학자 丹谷 郭??[1568~1633]을 祭享하는 사우로 1786년(정조 10) 12월에 건립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1790년의 백고리사 이건 기사는 대략 다음과 같다.
기사에서는 먼저 1790년 정월에 木手를 청해 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에 앞서 1789년 10월에 한파로 백고리사 이건 공사가 중지되었었는데, 이를 재개한 것이다. 공사는 3월 초에 단청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3월 17일 환안례를 거행하였다. 그런데 연전에 湖西의 사림이 안덕린을 入享하는 일로 嶺南 사림에게 통문을 보낸 적이 있었다. 당시 영남의 사림들은 안덕린의 ‘杖?之鄕’이 풍기군이라고 하여, 백고리사에 안덕린을 竝享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 이 사안으로 榮川郡의 伊山書院, 安東府의 三溪書院, 順興都護府의 紹修書院이 차례대로 통문을 발급하여, 여러 차례 敦喩하였다. 그런 까닭에 풍기군의 사림들이 향교 堂會에서 안덕린을 백고리사에 合享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안덕린 追享 때의 執事를 정했는데, 都執禮는 生員 南泰鎭, 都廳은 南泰一·李世檍, 都辦은 黃復源·李益彬이 맡았다. 안덕린의 위패 봉안은 환안례 때 함께 거행하기로 했다. 이에 祝은 儒生 柳尙潤이 순흥도호부의 黃羽漢에게 청하였다. 순흥도호부에서 봉안문과 常享祝式을 보내왔기에, 3월 17일 중정에 안덕린의 위패를 봉안한다는 뜻으로 列邑의 향교와 서원에 통문을 발급하였다.
통문을 발급했다는 기사 다음에는 이날 받은 황우한이 작성한 봉안문을 수록해 놓았다. 봉안문에는 안덕린의 행적과 봉안 과정이이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안덕린은 柳成龍의 문인으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으며, 훗날 풍기군에 은거하였다. 이처럼 안덕린이 풍기군과 영천군에 머물렀다고 하여, 이 지역의 사림들이 그의 추모 시설을 설립하자고 건의하였고, 이에 의논이 일어나 곽진을 제향하는 백고리사에 병향하게 되었음을 언급해 놓았다.
이어 3월 15일 각읍의 유생이 來集하였고, 16일에도 많은 道儒가 모이니, 그 숫자가 400여 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도회 때 開坐하여 제 집사를 청하였는데, 公事員은 영천군의 李漢龍과 순흥도호부의 安恂, 都執禮는 영천군의 진사 丁?祖, 初獻官은 안동부의 前 正言 趙錫晦, 亞獻官은 영천군의 이산서원 원장 生員 金?, 終獻官은 백고리사 社長 黃最源, 大祝은 李始儁·黃起源, 贊者는 생원 南泰鎭이 각각 맡았다.
16일 오후에 곽진의 위판을 사당에 환안하는 것으로 고유하였다. 告由儒生은 순흥도호부의 士人 黃鼎實이 맡았다. 이 기사 다음에는 고유문을 수록하였는데, 여기에는 새로운 터로 백고리사를 이건하는 것에 맞추어, 안덕린의 합향하게 된 사실을 아뢰고 있다. 환안례 직후 안덕린의 위판을 寫板하였는데, 寫板儒生은 이시준이 맡았다. 위판을 사당 안에 봉안하고 향을 거행하였고, 다음날 17일 卯時에 禮成祭를 거행하였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사림의 공론에 의거해 院祠에서의 先賢 제향이 결정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백고리사에 안덕린이 추향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호서 사림이 영남 사림에게 통문을 보내어 입향을 건의하였다. 이어 이산서원·삼계서원·소수서원 등을 중심으로 영남 사림이 백고리사 측에 병향을 촉구하였으며, 결국 풍기향교에서 고을 사림들이 의견을 모아 환안례 때 안덕린을 추향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慶星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資料集成』(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1차 작성자 :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