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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B.1847.4725-20160630.Y165021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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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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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상서
내용분류: 정치/행정-보고-청원서
작성주체 옥동서원, 순상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작성시기 1847
형태사항 크기: 95 X 105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관련자료

안내정보

1847년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 상서(上書)
1847년 6월에 황호선 외 48명이 피폐해진 서원의 재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원생을 늘리고, 원속들의 면역을 순상에게 요청하는 상서이다. 옥동서원은 익성공 방촌 황희를 제향하는 곳으로 1789년(정조 13)에 사액되었다. 하지만 서원의 재력이 부족하여 많은 유생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가진 토지와 노비들도 모두 사라졌다. 이에 60명의 원생에게 봄과 가을로 군역을 면제하는 댓가로 받는 번전을 거두어 서원의 1년 운영자금으로 사용해왔다. 하지만 그 자금으로는 서원의 건물을 수리하거나, 서원에서 부리는 사람들의 인건비도 부족하여 서원의 많은 일들을 처리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한편 상주의 또 다른 사액 서원들인 흥암서원충의단은 본손과 외척 후손들이 감사로 부임하여 특별한 논의가 없어도 많은 특전을 베풀어서 수백 명의 원생이 등록하고, 원속들에 대한 면역 혜택도 있다고 했다. 같은 사액의 은전을 받은 곳으로서 옥동서원의 상황은 이 두 곳과 많은 차이가 있으니 매우 한탄스럽다고 호소하고 있다. 그러던 중 신임 감사 김공현이 황희의 외척 후손인 것을 알고 다른 서원의 사례에 의거하여 옥동서원도 같은 혜택을 받게 해주길 요청하고 있다. 즉 지금은 아니지만 이처럼 서원의 재원이 고갈된 상태로 지속된다면 춘추 향사와 삭망 분향례도 장차 폐지할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하면서, 신임 감사의 조상을 모시고 또한 조정의 은전을 받은 서원의 운영을 걱정한다면 수백 명의 원생을 더해주고 원속들에 대한 면역혜택을 완문으로 문서화해서 내려주길 요청한 것이다. 이에 감사는 판결문에서 상주목사가 부임하길 기다려서 옥동서원 원장이 제기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검토하여 보고하라고 판결하였다. 이것은 서원에서 요구한 사항이 지역의 민정과 직접 연결되기에 상주목사가 검토하여 실현 가능한 방안을 제시하라는 의도로 파악된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47년 6월에 黃浩善 외 48명이 조잔해진 院力을 회복하기 위하여 院生의 加給과 院屬들의 免役을 巡相에게 요청하는 上書
1847년 6월에 黃浩善 외 48명이 조잔해진 院力을 회복하기 위하여 院生의 加給과 院屬들의 免役을 巡相에게 요청하는 上書이다. 상서는 옥동서원이 처한 경제적 상황과 그로 인한 원내의 문제점 및 다른 서원과 비교하여 공평하지 않은 면역 혜택에 대한 불만 제기와 문제 해결을 위한 요구사항 등으로 구성되었다. 옥동서원은 翼成公 厖村 黃喜를 제향하는 곳으로 1789년(정조 13)에 특별히 賜額의 은전을 받았지만, 서원의 원력이 근본적으로 매우 凋殘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선비들에게 공궤하는 것은 저축한 것에서 나가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에 미처 힘쓰기도 전에 토지가 없어졌고, 서원 내에서 부리는 자들도 원래 소속이 아니라 임시로 속한 자들로서 노비가 없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기본 財源은 토지와 노비임에도 불구하고 옥동서원은 이런 재원이 없기에 원력이 근본적으로 매우 조잔하였다고 한 것이며, 특히 사액서원이 되면서 많은 선비들이 방문하게 되었지만 이들에 대한 공궤도 어려운 형편임을 알 수 있다. 옥동서원은 운영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院生을 募入한 후 그들의 군역을 면제하는 대가로서 番錢을 거두어 1년의 비용으로 쓰고 있었다. 하지만 60명의 원생에게 봄과 가을로 돈을 거두어도 매번 자금이 부족하여 근심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원내의 많은 일들에 사람을 부려야 하는데 겨우 10명을 충당하여 假屬시켜서 除給하고, 약간의 薄土만이 있다고 하였다. 나아가 서원이 건립된 지 오래되어 장차 기울어 무너질 걱정이 있으나 수리할 물력이 없으며, 서원의 임원이 외부에 있을 때 혹 위급한 일이 있더라도 보고할 사람이 없어서 장차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우려 하였다. 그러면서 이처럼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있기에 이런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옥동서원의 어려움은 비단 경제적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경제적 제약과 지리적으로 상주목의 외곽 산간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떨어짐으로 인해 사액 서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위상이 축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치적으로 노론의 장기집권과 세도 정권하에서 남인의 입장을 견지해온 옥동서원에 대한 지방관의 관심도 상대적으로 줄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胥吏들의 업신여김이 날로 심해져서 원생을 약탈하고, 원속을 못살게 구는 것이 다반사로 있으며, 뒷일을 염려하고 꺼리는 바가 없는 것이 이를 그치지 않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많은 일들이 있기에 지금은 아니지만 춘추 향사와 삭망 분향례를 장차 폐지해야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은 거론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아가 이러한 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 자손들의 절박함을 말로 다하기 어렵고, 사액을 내려준 조정의 崇報하는 뜻도 남아있을 수 없을 것이라 한탄하였다. 한편, 상주의 서원들 중 興巖書院忠義壇은 本孫과 외척 후손(外裔)이 감사로 내려와 논의하지 않아도 번번이 두둔하고 보호한 까닭에 두 곳의 원생은 거의 수백 명을 넘고, 무릇 院屬과 관련해서도 모두 除役하였으나, 옥동서원은 홀로 그러하지 못하니 어찌 분개함이 심하지 않겠냐고 하였다. 흥암서원은 老論의 영수인 同春堂 宋浚吉을 제향하는 사액 서원이고, 충의단은 임란 당시 전사한 종사관 尹暹, 李慶流, 朴箎 등 3인과 상주 출신의 의병장 金俊臣, 金鎰 등의 공적을 포상하기 위해 건립한 곳으로 1792년(정조 17) 사액된 곳이다. 즉 옥동서원과 더불어 모두 사액 원사임에도 불구하고 두 곳은 신임 감사로 부임한 후손들에 의해 많은 혜택들이 주어져서 원활히 운영되고 있지만 자신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監司로 부임한 金公鉉이 황희의 외척 후손임을 알고 자신들도 두 곳처럼 혜택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상서를 올리게 된 것이다. 상서의 말미에는 감사가 후손으로서 尊衛 崇奉하는 도리를 잊지 말고, 옥동서원이 다른 서원의 사례와 같이 수백 명의 원생과 下隸의 戶役을 除給하는 完文을 내려서 오랫동안 서원이 쇠퇴하는 것을 막게 해주길 요청하였다. 이에 감사는 本官인 尙州牧使를 기다렸다가 上任인 院長의 措處하는 방법을 이치에 따져서 보고하라고 題音을 내렸다. 이것은 서원에서 요구한 사항이 지역의 민정과 직접 연결되기에 상주목사가 검토하여 실현 가능한 방안을 제시하라는 의도로 파악된다.
자료적 가치
이 상서는 완문과 품목 등의 관련 문서가 함께 묶여 있어서 당시 옥동서원 유생들이 서원 운영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노력한 실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관에서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과정도 파악되는데, 이를 통해 조선시대 청원제도 운영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道內尙州幼學黃浩善等謹齋沐再拜上書于
巡相閤下伏以本州之玉洞書院卽生等先祖翼成公厖村黃先生妥靈之所也先生▣…▣在國乘播誦輿口生等不
必覼縷仰煩 崇聽而錦官肅淸之像昭▣▣宮士林俎豆之奉已過累世▣…▣
正廟己酉特 宣恩額 宸章燦然如日新輝 朝家崇報之典可謂至矣但本院院(力)素(甚)凋殘多士之供億不出於素儲而辦於
倉卒以其無土地也院中之使令不責於原屬而付之假屬(以)其無奴丁也用是一年▣則僅得六十名院生收用春秋番錢而每
有不足之患許多使役則苟充一十名假屬除給若干薄土而擧有謀避之意以此(之)故院宇年久將有傾覆之患而無物可
修任員在外或有緩急之事而無人可報將至於莫可收拾之境而近來吏胥輩侮▣習日甚一日攘奪院生侵漁院屬視
若茶飯無所顧忌若此不已則春秋丁享朔望香禮將見廢閣而不擧矣子(孫)痛迫已無可言而 朝家崇報之意
顧安在哉本州書▣▣興巖忠義壇則無論本孫與外裔棠營本府之種種來莅者輒加斗護故二院院生殆過數百
凡係院屬一倂除役而本院則獨不然此豈非慨然之甚者乎竊伏惟念 閤下▣▣(翼)成公旣在外裔之列則尊衛崇
奉之道未必遞不如生等故玆敢不避屑越冒昧陳請伏乞一依他院例院生則(加)▣▣百名下隸則除給戶役成出完文使
之永世無替則生等(感)▣姑勿言 閤下仰體 朝(家)之意軫念外先之誠將幷美▣來後矣生等無任屛營祈懇之至
巡相閤下 處分 丁未六月 日 幼學黃昶熙
黃範熙
黃邁熙
黃永熙
黃淳老
黃綸老
黃宅老
黃衡老
黃海老
黃岡老
黃岱老
黃延老
黃一老
黃弼老
獻納黃起源
幼學 黃益鉉
黃啓鉉
黃龍善
參奉黃守黙
幼學黃斗鉉
黃容黙
黃奎鉉
黃台鉉
黃大鉉
黃集善
黃源善
黃摯鉉
黃秉鉉
黃{王+憲}
黃珗
黃穰
黃在喆
(黃)在鍾
黃基進
進士黃基定
幼學黃在五
黃禎五
黃在穆
黃在禎
黃在宗
黃在直
黃在中
黃在斅
黃馨周
黃憲周
黃翼周
黃鳳周
黃命周
待本官上任措
處之方論理報
來之事
卄三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