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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유병문(劉秉汶) 등 산송관련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9+KSM-XB.1898.0000-20170630.000000237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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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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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유병문, 풍기군
작성시기 1898
형태사항 크기: 75.2 X 55.8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예천 감천 강릉유씨 벌방종가 /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관련자료

안내정보

1898년 유병문(劉秉汶) 등 산송관련 상서(上書)
1898년(광무 2) 10월에 안동(安東)에 사는 유병문(劉秉汶) 등 강릉유씨 문중 사람 18명이 연명하여 풍기(豊基) 관아에 올린 산송관련 상서(上書)이다. 월감산(月甘山) 선영에 1896년에 투매(偸埋)한 무덤 주인을 못 찾고 있으니 파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유지영

상세정보

1898년에 安東에 사는 劉秉汶 등 강릉유씨 문중 사람들이 연명하여 豊基 관아에 올린 산송관련 上書.
1898년(광무 2) 10월에 安東에 사는 劉秉汶 등 강릉유씨 문중 사람 18명이 연명하여 豊基 관아에 올린 산송관련 上書이다. 강릉유씨 문중의 선영은 豊基 관아의 관할인 殷豊面 月甘山에 있었다. 이 선영은 상서 본문 앞부분에 언급된 대로, 신해년(1851)에 이미 어떤 사람(朴聲奎)이 偸葬하여 산송을 벌여 무덤을 파내게 한 적이 있던 곳이다.
그때의 산송 이후 40년 동안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 병신년(1896)에 누군가가 지난번에 무덤을 파낸 곳에서 '돌을 던져 닿을만한' 거리에 偸埋를 한 것이다. 3년이 되도록 무덤 주인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상과 같이 상황을 설명한 劉秉汶 등이 요청하는 바는, '將校를 지정하여 산 아래 洞民과 함께 즉각 무덤을 파내 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풍기 관아에서는 16일에, "한 조각 偸塚이 3년간 주인이 없으니, 그 당한 바가 어찌 절박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산소가 있는 洞에 傳令을 내려서, 기한을 지정하여 牌를 세움으로써, 무덤 주인이 듣고 스스로 파내게 할 것이다."라고 처결을 내리고 있다. 즉 무덤을 바로 파내달라는 것은 들어주지 않았지만, 傳令을 보내 적극적으로 무덤주인을 찾게 하는 조치를 취해준 것이다.
조선후기 山訟 所志類의 文書樣式과 分類, 김경숙, 奎章閣25, 2002
朝鮮後期 山訟 硏究 : 18,19세기 古文書를 중심으로, 전경목,
1차 작성자 :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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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898년 유병문(劉秉汶) 등 산송관련 상서(上書)

安東甘泉面閥芳里居民。幼學劉秉汶等。百拜上言于
城主閤下。伏以。民等先塋。在於治下殷豊面月甘山麓。而于今五六代。無弊保護矣。不意去辛亥年分。有人偸埋。
故卽告官庭。掘去其塚。而自後四十餘年。無人窺占者是加尼。去丙申八月良中。不知何許人。適値紛紜之世。
妄生僥倖之計。而乘夜偸埋於前掘處內砂投石之地。憫迫情私。不可一日遲滯。而塚主不得。徒鬧官庭。心切惶
悚。窮覓塚主。拕至今日。問靑山而無語。爲白骨而有恨。大抵偸埋者。暫避當場之禁斷而已。過三歲。永匿不現。彼
之理屈。於此可燭矣。玆敢仰籲於明政之下。伏乞。洞燭敎是後。定將校。眼同山下洞民。卽刻掘移。使此邑之
民。得保先壟之地。千萬血祝之至。
行下向敎事。
豊基城主。處分。

戊戌十月日。幼學。劉柱昊劉秉琥劉秉道劉秀永劉汶永劉秉奎。前都事劉秉洙。幼學。劉秉甲劉秉韶劉秉殷
劉秉穆劉武烈劉秉河劉大烈劉秉懿劉聲烈劉成烈。等。

一抔偸塚。三年
無主。爲其所遭
者。豈不憫迫。當傳
令于山在洞。定限立
牌。使偸塚主
聞知。自掘【是矣。若過限。則自洞掘去】向
事。十六日。

豊基官。[手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