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851년 유인영(劉仁永) 산송관련 소지(所志)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9+KSM-XB.1851.0000-20170630.000000237428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유인영, 유의영, 풍기군
작성시기 1851
형태사항 크기: 85.5 X 61.6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예천 감천 강릉유씨 벌방종가 /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관련자료

안내정보

1851년 유인영(劉仁永) 산송관련 소지(所志)
1851년(철종 2) 2월에 안동(安東) 벌방리(閥芳里)에 사는 유인영(劉仁永)풍기군월감산(月甘山)에 있는 선영을 두고 산송을 벌이면서 올린 소지(所志)이다. 무덤 주인인 상주(喪主)와 그를 조종한 친척인 박성규(朴聲奎)주(秦) 상인(喪人)을 고발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유지영

상세정보

1851년에 劉仁永月甘山에 있는 선영을 두고 산송을 벌이면서 풍기군 관아에 올린 所志.관아에 올린 所志.
1851년(철종 2) 2월에 安東 閥芳里에 사는 劉仁永풍기군月甘山에 있는 선영을 두고 산송을 벌이면서 풍기군 관아에 올린 所志이다. 강릉유씨 벌방 종가 문중 사람 7명이 연명하고 있다.
유인영이 소지에서 말하고 있는 사건 경위는 다음과 같다. 풍기군의 月甘山에는 3,4대 동안 지켜온 선영이 있다. 묘지기가 선산 근처에 투매한 무덤이 있다고 알려오자 가서 살펴보았더니, 분묘 穴 의 좌변에 '앉으나 누우나 모두 보이는 곳[坐臥俱見]'이면서 10보 안쪽의 거리에 투장한 것이었다. 그 무덤 주인 집에 가보니 喪主는 15세의 어린이었는데, 그가 말하길 '매부 朴聲奎와 고종(姑從) 喪人이 지휘하여 밤에 매장했다.'라고 하였다.
유인영朴聲奎喪人이 무덤 주인의 집안을 좌지우지하면서 偸埋하는 일을 벌인 것이고, 그 무덤을 파내는 것의 여부도 그들에게 달려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관아에 요청하는 바는 그 두 사람과 상주를 잡아다가 偸葬의 율을 적용시키고, 무덤을 파내게 독촉해 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풍기군 관아는 11일에 "禁葬은 원래부터 國憲이다. 먼저 지형과 거리를 그려서[圖尺] 올 것."이라는 처결을 내렸다. 아울러 처분을 이행할 담당자로 禮房 서리를 지정하고 있다.
조선후기 山訟 所志類의 文書樣式과 分類, 김경숙, 奎章閣25, 2002
朝鮮後期 山訟 硏究 : 18,19세기 古文書를 중심으로, 전경목,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1차 작성자 : 유지영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51년 유인영(劉仁永) 산송관련 소지(所志)

安東閥芳居民。幼學劉仁永等。
右謹言。害及祖先。痛迫骨髓而泣血。仰籲於二天孝理之下。伏乞洞燭焉。民等先塋在於治下月甘山麓。而于今
三四代。無弊保護矣。不意。今者。墓直以先山壓近處偸埋事致告。故卽卽往省形止。則其所偸窆處。距先墳穴左邊
坐臥俱見。不過數十步之內。胸次忽塞。毛骨有竦。卽往彼隻之家。詰之以人所不忍爲之事。則其家本無主張。而其所謂主喪。乃十
五歲數尺之童也。彼童言內。於其散髮在喪之日。奚暇視營葬之地。而渠之妹夫朴聲奎。姑從喪人。自外指揮。暮夜埋葬於
右地云。大抵偸埋之日。一里之人不知。墓直亦在於同里。而全然不知。其所設計。可謂神出鬼沒。而謀害人之先塋速窆。姻屬爲心者。其非萬
萬痛惡乎。噫。彼兩人。於其彼隻家事。欲左左欲右右。而旣已偸埋爲計。則其掘移與否。卽掌握間事也。伏乞。捉致朴聲奎喪人與彼
隻。照以偸葬之律。特施督掘之典。則生當隕首。死猶結草。瀝血以誠。千萬血祝之地。
行下向敎事。
豊基城主。處分。
辛亥二月日。劉義永泰永祜永學永渭永柱厦。童蒙 蓍億。等。

禁葬。自有
國憲。爲先圖
尺以來事。
十一日。禮。

豊基官。[手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