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에 柒谷에 사는 李相羲가 경북관찰사에게 올린 上書
1900년(광무 4) 9월에 柒谷에 사는 李相羲가 경북관찰사에게 올린 上書이다. 李相羲는 弘窩 李斗勳(1856~1918)의 내종질이자 문인이었다. 1900년 9월에는 李相羲가 밭을 매입하다가 밭에 심겨 있던 콩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이 발생했다. 柒谷郡 관아에서는 그의 스승인 李斗勳을 주범으로 지목하는 판결을 내리자, 李相羲는 경북관찰사에게 上書를 올려서 다시 처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李相羲는 상서 본문에서 그동안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전략) 저는 생계가 곤란하여 궁벽한 산골짜기로 이사해 산 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高靈에 사는 李斗勳 어르신에게 수학하며, 涵養의 은혜를 깊이 입었습니다. 李 어르신은 저의 궁핍한 처지를 불쌍히 여기셔서 家庄을 떼어주고 그의 이웃에 이사하게 하려 하였습니다. 지난 7월에 마침 근처 마을에 사는 서리 朴泰煥이란 사람이 ‘官牒印文’을 가지고 와서는, 洞任과 함께 그의 죽은 동생이 경작[佃耕]하던 12마지기를 보증서서 매각[保賣]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즉 李相羲는 李斗勳의 도움으로 高靈으로 이사하려 하던 중 朴泰煥이란 사람의 주선으로 전답 12마지기를 매입한 것이다. 문제는 금월(9월) 4일에 발생하였다.
"(땅을 매입하면서) 금년의 반곡[半穀]은 골짜기 마을에 팔아서 새로 이사하며 먹을 양식을 마련하였습니다. 매입이 완료된 이후에 그대로 수확하였습니다. 그런데 금월(9월) 4일에 朴 서리 동생의 첩이 밭두렁의 콩[小菽]은 매각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校南宅에게 빼앗겼다고 高靈에 誣訴했습니다. 校南宅이란 李斗勳 어르신의 택호입니다. 관아에서 題音을 내리길, ‘소위 校南宅은 밖으로는 학자를 칭하면서 안으로는 이익을 챙기는[牟利] 일을 행하였다. 奴를 시켜서 이치에 어긋나게 곡식을 탈취하였으니, 그 奴를 잡아 와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즉 李相羲는 땅을 사면서 밭에 아직 익지 않은 곡식을 미리 팔았는데, 땅의 원래 주인인 朴泰煥 동생의 첩이 그 곡식을 뺐겠다고 李斗勳댁을 관아에 고발하였고, 이로 인해 李斗勳은 노비가 잡혀가는 일을 당한 것이다. 이에 대해 李斗勳의 대응은 다음과 같았다.
"李 어르신은 즉시 그 奴를 보냈고, 아울러 白活을 올려서 그것은 저[李相羲] 집의 일이라고 밝히고, 그 콩도 돌려주게 했습니다. 그런데 당해 수령은 처음부터 質辨도 하지 않고, 혹독히 杖을 치고는 칼을 씌워 가두어버렸습니다. 이는 주인을 대신하여 奴를 욕보이고 무결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으니, 귀로 차마 들을 수 없고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또 背題에 ‘殘忍하게 稱託하였으니 또한 극히 흉악하다. 뚝방의 콩은 물론이고 穀穗도 즉각 돌려주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洞任도 함께 杖을 치고, 사나운 將校를 선발하여 朴女에게 (곡식을) 빼앗아 돌려주게끔 했습니다. 將校에게 분부하기를, ‘穀穗를 (빼앗는 것이) 어려우면 李某를 잡아와라.’라고 하였습니다. 또 서리들에게 말하길, ‘너희들은 왜 그 집을 부수지 않느냐’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수령은 李斗勳댁의 奴를 엄히 벌하고 잡아 가두었다. 朴女, 즉 朴泰煥 동생의 첩은 콩을 돌려받았지만, 콩 뿐 아니라 전답에 심겨 있던 다른 곡식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령은 將校에게 시켜서 그 곡식을 돌려주게 했고, 곡식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서리들에게 집안을 부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저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가서 사실대로 呈訴하였습니다. 그런즉 題音에서, ‘(너는) 李씨 부자집에서 寄食하면서 공부하고 있을 뿐인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곡식을) 판다는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을 사서 곡식을 수확한 것은 증인도 있고 이웃의 눈도 있는데 거짓을 말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곡식을) 빼앗아서 돌려주려면 저에게 받아가면 족합니다. 李 어르신이 무슨 관련이 있어서 이런 일을 벌인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李相羲는 저간의 사정을 수령에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수령은 李相羲는 수학을 위해 李斗勳의 집에 머물고 있을 뿐이고, 실제 전답을 매입하고 곡식을 돌려주지 않고 있는 것은 李斗勳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李相羲는 이상과 같이 그간의 소송 경위를 설명하였다. 이어서 李斗勳은 道內에서 존경을 받는 학자인데, 朴女의 誣訴와 수령의 잘못된 판결로 모욕을 받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사정을 세세히 살피고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해 관찰사는 9월 13일에 다음과 같이 처결을 내렸다. "우선 이 글을 보고 고을의 題音을 보니, ‘밖으로는 학자를 칭하고 안으로는 이익을 꾀했다.’라 하고, 또 ‘殘忍하게 稱託하였으니 또한 극히 흉악하다. 뚝방의 콩은 물론이고 穀穗도 즉각 돌려주어라’라고 하였다. 또 ‘이씨 부자집에서 寄食하는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판다는 말인가.’라고 하였다. 또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아 武官이 무식하다고 하여도 涇渭를 전혀 구별 못 하고, 스스로 官威를 믿고 士民을 욕보이는 폐해를 벌이는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할 수 있는가. 일의 본질을 따지면 비록 밭둑의 콩을 거두는 것으로 인하였지만 ▣…▣ 朴女의 誣訴는 官牒印文를 보면 알 수 있다. 어찌 잘 살피지 않는가. 이는 필시 朴女가 스스로 官屬으로서 수령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몰래 헤아리고 영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소송을 일으켜 이런 어처구니없는 변이 일어나기에 이른 것이다. 그 행한 바를 살피면 말할 것도 없다. 소위 朴女의 교활한 악행은 어리석은 부녀자라 그냥 둘 수 없다. 즉각 잡아다가 엄히 笞 20대를 치고 가두고는 보고하라. 그리고 杖을 치고 가둔 李奴는 즉시 풀어줘야 할 것이다. 대저 上納을 이미 발송했다고 해놓고는 軍餉은 아직도 運納하지 않았다. 비록 이런 사단이 있었지만 보고한 것의 근원을 살피니, 매우 한탄스럽고 놀랍다. 소위 首書記와 結戶色는 즉시 大邱郡으로 압송하라. 엄한 訓令을 내릴 것이니 속히 거행하고 현황을 보고하라.’라고 하였다. 즉 李相羲의 요청을 들어주고, 아울러 高靈郡 수령이 軍餉을 상납하지 않은 현안도 문제 삼아서 담당 서리를 압송하라는 지시까지 내리고 있다.
朝鮮時代 明文에 관한 文書學的 硏究, 김성갑,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1차 작성자 : 유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