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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권종모(權宗模) 등 산송관련 소지(所志)-1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7+KSM-XB.1830.4790-20150630.07302310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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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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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권종모, 권회언, 권경모, 예천군
작성지역 경상북도 예천군
작성시기 1830
형태사항 크기: 71.9 X 57.6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예천 저곡 안동권씨 춘우재고택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대제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관련자료

1830~1831년 맛질권씨 문중 예천 저곡리 산송 문서
이 일련 문서는 1830년(순조 30) 7월부터~1831년(순조 31) 3월까지 예천(醴泉) 소저곡(小渚谷)에 사는 안동권씨(安東權氏) 문중이 같은 집안사람과 벌인 산송의 내역을 보여주고 있다. 소송은 권종모(權宗模) 등이 연명하여 제기하고 있고, 상대방은 권성모(權省模)라는 인물이다. 분쟁의 대상이 되는 산지는 저곡리(渚谷里) 집성촌 뒤에 있는 안동권씨의 선산이다.

권종모(權宗模)의 주장에 따르면, 분쟁은 문중 사람인 권성모(權省模)가 분쟁 지역의 저뇌(主腦)에 해당하는 지점에 어머니의 무덤을 설치함으로써 발생하였다. 소송은 7개월간 이어졌는데 그 경과는 총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단계에서는 권성모가 무덤을 투장(偸葬)하자 권종모 등은 관아에 소송을 제기했고, 관아에서는 해당 지역의 지형을 그려 오라는[圖形] 처결을 내렸다. 이때 올린 소지(所志)와 산도(山圖)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두 번째 단계는 ①경인년(1830) 7월 소지(所志), ②경인년 7월 20일 수표(手標), ③경인년 10월 소지, ④경인년 11월 소지, ⑤경인년 12월 의송(議送) 등 총 5건의 문서를 통해 살필 수 있다. 관아의 처결에 따라 지형을 그리고 있는[圖形] 와중에 권성모가 예전에 집안의 다른 사람도 부근 산지에 무덤을 쓴 일이 있었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에 권종모 등은 곧 이장할 것을 맹세하는 내용의 수표(手標)를 권성모를 포함한 문중사람 3명으로부터 받아내었다. 그리고 ①번 소지를 올려서 이 사실에 대한 입지(立旨)를 요청하였다. 이때 받은 수표는 권세문(權世文)으로부터 받은 1건만 남아 있다. 그러나 권성모는 무덤을 이장하지 않고 버티는 행태를 보였고, 이에 권종모 등은 10월에 다시 예천군수에게 소지를 올렸다.(③) 그러나 군수가 상을 당하여 관아를 비우자 이웃 고을 겸관(兼官)에게 같은 내용의 소지를 올렸지만(④), 환곡 업무 때문에 바쁘다는 이유로 기다리라는 처분을 받았을 뿐이었다. 이에 권종모 등은 관찰사에게 의송(議送)을 올려서 신속한 판결을 요청하였다.(⑤) 관찰사는 겸관에게 속히 처결할 것을 지시하는 처분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단계의 소송 경과를 보면 권성모는 계속 무덤을 파내지 않고 있었다.

세 번째 단계는 ⑥신묘년(1831) 3월 소지, ⑦신묘년 3월 11일 다짐(侤音)의 2건의 문서를 통해 살필 수 있다. ⑥번 소지에서 권종모가 고발하는 권성모의 행태는 '이장할 생각 없이', '한가롭게 몇 달을 보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권찬옥(權贊玉)이라는 다른 족인(族人)이 부근 산지 두 군데에 조모의 무덤과 아버지의 무덤을 투장(偸葬)한 것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무덤 을 투장한 자리는 지난해에 권성모의 이의 제기에 따라 이장한 족인의 무덤(權絅模 妻의 무덤)이 있던 지점이었다. 수령의 처결에 따라 권성모는 관아에 출두해서 3월 12, 13일 중에 무덤을 이장하겠다는 다짐(⑦)을 제출하고 있다.

네 번째 단계는 ⑧신묘년(1831) 3월과 ④같은 해 4월에 권하언(權河彦) 등이 올린 소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때 소지를 올린 대표 인물은 권종모(權宗模)가 아니라 그 윗대 항렬인 권하언(權河彦)이다. 권종모(權宗模)는 ⑧번 문서에는 연명하고 있지 않고 ⑨번 문서에는 연명하고 있다. 소송의 상대방은 '권용모(權庸模)'로 이름이 적혀있다. 권용모는 이전까지 소송 상대방이었던 '권성모(權省模)'와 동일 인물로 보인다. 소지 본문과 제사에 적힌 이름자 중에 '용(庸)'자를 나중에 다시 써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이어지는 4월의 所志에는 본 소지에서 말하는 행위와 같은 행위를 한 사람으로 '權省模'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소송의 두 번째 단계에서 권세문(權世文)이 무덤을 이장한 자리에 권성모가 또 다시 투장을 했던 것이다. ⑧번 소지에서 예천군수는 면임을 시켜 무덤을 이장하도록 독촉하게 했다. 그러나 권성모는 계속 버텼고, 이에 ⑨번 소지를 겸관(兼官)에게 올려 이를 고발하여, 관아에 잡아들이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아내고 있다. ⑨번 문서를 끝으로 권성모와 관련된 산송에 관한 문서는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관아에 잡혀 온 권성모는 이후 무덤을 이장하고 더 이상 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참고문헌
전경목, 1997, 「山訟을 통해서 본 조선후기 司法制度 운용실태와 그 특징」, 『법사학연구』18.
김경숙, 2002, 「18,19세기 사족층의 墳山 대립과 山訟」, 『한국학보』28-4.

문서

번호

자료명

발급

수취

1830년 권종모(權宗模) 등 산송관련 소지(所志)-1

권종모(權宗模) 외

예천군수

1830년 권세문(權世文) 산송관련 수표(手標)

권세문(權世文)

동중 족인

(洞中族人)

1830년 권종모(權宗模) 등 산송관련 소지(所志)-2

권종모(權宗模) 외

예천군수

1830년 권종모(權宗模) 등 산송관련 소지(所志)-3

권종모(權宗模) 외

겸관(兼官)

1830년 권종모(權宗模) 등 산송관련 의송(議送)

권종모(權宗模)· 권영진(權永震) 외

경상감영

1831년 권종모(權宗模) 등 산송관련 소지(所志)

권종모(權宗模) 외

겸관(兼官)

1831년 권성모(權省模) 산송관련 다짐(侤音)

권성모(權省模)

예천군수

1831년 권하언(權河彦) 등 산송관련 소지(所志)-1

권하언(權河彦) 외

예천군수

1831년 권하언(權河彦) 등 산송관련 소지(所志)-2 

권하언(權河彦) 외

겸관(兼官)

1차 작성자 : 명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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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정보

1830년 권종모(權宗模) 등 산송관련 소지(所志)-1
1830년(순조 30) 7월에 권종모(權宗模) 등이 집안사람 권성모(權省模)와 집성촌 뒤에 있는 산지를 두고 벌린 산송과정에서 예천군에 올린 소지(所志)이다. 권성모가 해당지역에 이미 들어와 있는 다른 무덤도 파내면 자기도 이장할 것이라고 하자, 각 무덤 주인에게 수표(手標)를 받아서 제출하고 있다. 아울러 입지(立旨) 발급을 요청하였는데, 예천군 관아는 이미 서로 화해했으니 입지를 발급할 필요는 없다고 처결을 내렸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상세정보

1830년에 權宗模 등이 醴泉郡에 올린 산송관련 所志
1830년(순조 30) 7월에 權宗模 등이 醴泉郡에 올린 산송관련 所志이다. 이 산송은 같은 집안사람인 權省模渚谷里 집성촌 뒤에 있는 主山 구역에 함부로 어머니의 무덤을 入葬한 것 때문에 발생하였다.
권종모 등은 이 소지를 올리기 전날에 권성모가 主腦에 偸葬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벌였고, 관아의 처결에 따라 해당 지역의 지세를 그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권성모가 다른 이의를 제기하였는데, 예전에 다른 집안사람도 이미 뒷산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 무덤을 썼다는 것이다.
권종모는 과연 그러한 일이 있었지만, 그곳이 要地가 아니었기 때문에 서로 쟁송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권성모가 지금 다른 분묘를 이장하면 자기도 무덤을 파내겠다는 뜻으로 하늘에 맹세하였다고 하고 있다. 그래서 권종모 등은 주산과의 관계가 緊歇함을 막론하고 먼저 매장한 사람들의 무덤을 파내기로 하고, 각각 手標를 받아 내었다. 그리고 수표 세 장을 납부하면서 立旨를 발급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예천군 관아는 처결하기를, 이미 서로 화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관에서 입증해줄 필요가 없다고 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30년 권종모(權宗模) 등 산송관련 소지(所志)-1

小渚谷化民權宗模等。
右謹言所志段。民等昨日所訴。權省模偸埋主腦事。及此圖形之際。渠言以年前族中數人入窆於後谷
稍遠之地。憑藉稱託是如。民等族中果有此事。而旣非要地。故不爲失和爭訟之擧。而致有今日罔測之變。
今言先掘他墳則渠當卽掘之意。指天爲誓是如。民等。無論緊歇。督掘先埋之人。各捧手標。以爲從
速移厝之計。玆以手記三丈帖連仰訴爲去乎。伏乞立旨踏印成給。以爲鐵券憑考事爲只爲。
行下向敎事。
城主 處分。
庚寅七月日。所志。化民。權會彦權景模權舜模權佑模權鶴模權仁模權義模權興模權弘模權摯模權宗文權炳文權會文。等。

官 [署押]

立旨者。便是立證。
旣至成標私和
之境。則官豈立證
於其間向事。
卄一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