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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청천서당(晴川書堂)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6+KSM-XF.1875.4784-20140630.E47844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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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청천서당
작성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작성시기 1875
형태사항 크기: 102 X 57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관련자료

안내정보

1875년 청천서당(晴川書堂) 통문(通文)
1875년(고종 12) 4월 20일에 청천서당에서 도내 어르신들에게 보낸 통문이다. 1875년 성산이씨 문중은 만귀정(晩歸亭)을 중수하기로 하고 계를 조직하였다. 중수 사업에 도움을 주기 위해 각지에 통문을 보냈는데, 이 때 작성된 통문이 6건이 남아 있다. 만귀정은 성산이씨 가문의 응와 이원조(1792~1872)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 1851년부터 강학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낸 곳이다. 현재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에 위치하고 있다. 본 통문에서 청천서당 사람들은 여러 어르신들은 이 공사를 함께하길 바란다고 말 하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상세정보

1875년(高宗 12) 4월 10일에 晴川書堂에서 晩歸亭 중수 관련 사안으로 道內 어르신들에게 보낸 通文.
1875년(高宗 12) 4월 20일에 晴川書堂에서 道內 어르신들에게 보낸 통문이다. 1875년 星山李氏 문중은 晩歸亭를 중수하기로 하고 稧를 조직하였다. 중수 사업에 도움을 주기 위해 각지에 通文을 보냈는데, 이 때 작성된 통문이 6건이 남아 있다. 晩歸亭은 星山李氏 가문의 凝窩 李源祚(1792~1872)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 1851년부터 講學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낸 곳이다. 현재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에 위치하고 있다.
본 通文에서 晴川書堂 사람들은 "옛날부터 사람들은 혹 事業을 베풀기도 하고, 학문과 문장에 공명을 세우기도 했지만, 항상 이를 겸하기 어려운 것이 근심이었다. 그러나 우리 定憲公 凝窩先生은 하늘과 땅에서 剛明하고 正大한 기운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문장은 웅대하면서 굳세고 바랐고, 학문은 天人性命의 본원에 부합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벼슬길에 올랐다. 이에 시정의 폐해를 진달하고, 子游가 武城에서 거문고 소리로 백성을 다스린 것처럼 수령으로 고을을 여러 번 다스렸다. 중외에서 그의 치적을 서로 칭찬했고 이는 國史에 실려 있다."라고 하여 李源祚의 훌륭함을 말하고 있다. 이어서 고을의 각 문중에게 사업에 동참해 주기 바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노쇠하였다고 물러남을 고한 뒤에는 伽倻山 布川에 講道하는 곳을 만들어 놀고 ‘晩歸’라 명명했다. 이를 사림들과 함께 하고자 하여, 사람마다 義理의 학문을 모두 알게 하였다. 그런데 세월이 바뀌어 옛날에 講道하던 곳이 더러워지고 무너진 곳이 생겼다. 지금 마땅히 이를 수리해야 완전하게 해야 한다. 여러 어르신들은 이 공사를 함께하길 바란다." 라고 하였다.
晴川書堂은 東岡 金宇顒(1540~1603)을 모시던 晴川書院의 후신으로, 1871년(高宗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된 것을 고쳐 세운 것이다. 晴川書院은 檜淵書院과 함께 星州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었다. 본 通文에 연명한 사람은 堂長 金在瓚, 齋任 李景熙을 비롯한 40명이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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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청천서당(晴川書堂) 통문(通文)

通文。
右通告事。歷數千古來。人人或施之事業。功名或見於文章學問。常患難兼。而惟我 定憲公凝窩李先生。賦天地剛明正大之氣。文章亦如其所賦。而宏博勁正。又得來學問中天
人性命之本原。而早登仕。疏陳時政之弊。屢試武城之絃歌。中外交誦嘉謀。讜論著在國史。及告老而歸。又未嘗不以斯文自任。大振菁莪之化。搆得講道之所于伽倻山中布川之上。命之曰。
晩歸。是豈惟輞川綠野平泉之自適己事。而全于子孫哉。欲與士林共之。而幈幪于斯木鐘秩發。使人人皆知義理之學。可下上乎。白鶴山中魏文靖之築室。而吾士林先父老尊衛之。而曾修一
樓實出於報佛之誠也。然則我先生其於事業功名文章學問。可謂兼兩得也。主家之竹帛。士林之羹墻。久而有不可泯者。且篋裏之文章。氣魄已垂世。而自有不朽。彼一亭榭之廢興。卽
東坡翁所謂世有足恃者。而不在乎臺之存亡者也。然亦先生之杖屢遺躅也。至今可像其彷彿於泉石之間。吾先父老之所揖讓進退之地也。嗚乎。滄桑一翻。非惟人事之異。昔幷與其講道之所。
而鏝汚欀頹於星霜屢易之中。今當修而完之。瞻仰以斯世之巋然。一魯殿不惟其慈孫也。 僉君子亦時念另圖共敦此役。則先生當日共之之義。先父老尊衛報佛之誠無替。而曷不幷行於
其間哉。以是諒裁。千萬幸甚。
右文通
道內 僉座 前。
乙亥四月二十日。晴川書堂會中。
堂長金在瓚 齋任李景熙 李重坤 製通都相濩 李貞基 宋鴻訥 寫通李誠熙 呂周淵 張浚升 會員呂昇奎 李鐸英 宋鴻來 張鎭樞 金樞運 宋鍾述 金元熙 李述淵 金庸直 李基馥 金培林 裵疇煥 鄭在鳳
鄭宗鎬 李基穆 李啓源 成道植 郭相鍾 李鳳熙 宋晦根 張基杓 李承洛 都相禹 金貞應 李愚復 呂東淵 宋鴻碩 丁奎熹 金翊東 都在哲 呂相韓 等。

[피봉]
道內 僉座下。
晴川書堂通文。
[피봉]
乙亥四月二十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