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高宗 12) 3월 20일에 星州 鄕校에서 晩歸亭 중수 관련 사안으로 도내 각 鄕校에게 보낸 通文.
1875년(高宗 12) 4월 10일에 星州 鄕校에서 道內 각 고을 鄕校에 보낸 통문이다. 1875년 星山李氏 문중은 晩歸亭를 중수하기로 하고 稧를 조직하였다. 중수 사업에 도움을 주기 위해 각지에 通文을 보냈는데, 이 때 작성된 통문이 6건이 남아 있다. 晩歸亭은 星山李氏 가문의 凝窩 李源祚(1792~1872)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 1851년부터 講學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낸 곳이다. 현재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에 위치하고 있다.
星州 鄕校는 앞서 같은 날 3월 10일에 檜淵書堂로부터 중수 사업에 동참해달라는 通文을 받았다.(1875년 회연서당(檜淵書堂) 통문(通文)-2) 본 通文은 檜淵書堂의 요청에 따라 星州 鄕校에서 고을 내에 문중에 회의를 소집하는 내용이다. 같은 내용으로 고을의 각 문중에 보낸 통문도 있다.(1875년 성주향교(星州 鄕校) 통문(通文)-1)
본 通文에서 星州 鄕校 사람들은 "벼슬을 하는 자는 꼭 학문을 겸하는 것은 아니고, 학문하는 자는 꼭 벼슬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定憲公[李源祚]은 벼슬을 하여 卿相에 이르렀고, 학문을 하여 문장을 겸비했다. 이에 후생의 가르침이 되었으니 그 業을 다 갖췄다고 할만하다."라고 하여 李源祚의 훌륭함을 말하고 있다. 이어서 고을의 각 문중에게 사업에 동참해 주기 바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精舍를 伽倻山 泉石에 세우고 春秋[일년내내]로 講學을 하여 폐하지 않았다. 고을과 영남의 사림이 모여들었고, 원근에서 그 감화를 입었으니 그의 자취는 오래 지속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사는 변천하니 人事도 바뀌어 버리는 바람에, 晩歸亭이 옛날의 광경을 보존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했다. 이는 본가 후손만의 책임이 아니다. 실로 전 고을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이에 고을의 준엄한 의론이 필요하다. 도내 각 향교에게 고하여 회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하니, 여러 분들은 응해주길 바란다." 라고 하였다.
본 通文에 연명한 사람은 直員 李基澈, 掌議 朴景東을 비롯한 104명이다.
1차 작성자 : 명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