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3년 2월부터 1769년 2월까지 작성된 英陽鄕校 兩班儒生들의 명단인 執綱案
내용 및 특징
이 자료는 1723년부터 1769년까지 작성한 양반유생들의 명부인 執綱案이다. 이 집강안은 당해 연도마다 추입되는 인물을 기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시기적으로 다른 집강안과 중복되지만 등재인물은 중복되지 않는다. 집강안은 향교의 所任을 맡고 석전제에 참석하였던 향중 사족의 직임록으로 일반적으로 교임록을 말한다. 그러나 이 집강안에는 職任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영양현은 1413년에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영해의 속현이 되었다가 1676년에 邑民들이 復縣을 청하여 복설하였으나, 다음해에 다시 영해부로 이속시켰다. 1678년 邑民들의 요청으로 읍내면․동남면․덕봉면․수비면은 진보현에 移屬되었고, 청기면․석보면은 영해에 移屬되었다. 이후 1683년 邑民 南時稷 등이 진정하여 특명으로 復說하고 현감을 두고 독립시켰다. 이때 석보면은 계속 영해부에 영속시키고, 청기면은 영양에 환속하였다. 이후 석보면은 1906년에 영양군으로 다시 이속되었다. 이처럼 태종이후 오랜 기간 영해의 속현으로 존재하였던 영양현은 숙종대 복현이 되어서야 비로소 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1684년 향교가 건립되었다.
이 집강안은 18세기 중반의 영양내 대표적인 사족들을 대부분 망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기재된 유생들은 모두 20개 성씨, 516명으로 이들의 이름만이 기록되어 있어서 정보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들 성씨들의 添入현상을 시기별, 성씨별로 살펴보면 영양내 사족들의 족세와 새로운 성씨의 도래 등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이들 성씨는 각종 지리지 및 읍지에 나오는 성씨들과 비교해 함으로써 영양에서 갖는 위치를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 英陽의 토성은 南·李·金·房(方)이며, 靑杞縣의 續姓으로는 兪·崔씨가 石保의 續姓으로는 金氏가 있었다. 1832년경에 작성된 『慶尙道邑誌』에서는 토성으로 南, 金氏가 남아 있으며, 來姓으로 漢陽趙氏, 咸陽吳氏, 綾州具氏, 奉化琴氏, 安東權氏, 野城尹氏, 野城鄭氏, 潘南朴氏, 月城孫氏, 竹山安氏, 丹陽禹氏, 熊川朱氏, 寧越辛氏 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개 읍지 등에 기재된 성씨들이 그 지역을 대표하는 양반사족들임을 감안한다면, 19세기 초 영양현을 대표하는 성씨들은 모두 15개였으며, 이중 13개가 來姓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들 성씨는 20세기 초에 작성된 『嶠南誌』에도 동일하게 기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계속해서 지역사회를 주도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실제 이 집강안에 나오는 516명의 인물들 중 趙氏가 201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하며, 다음으로 吳氏 79명, 權氏 53명, 南氏 31명, 정씨 27명, 구씨 27명, 김씨 21명, 금씨 16명, 이씨 15명, 박씨 13명 주씨 8명, 우씨 3명, 기타 11명 이었다. 읍지에 나오는 성씨를 그대로 신빙한다면 이들의 본관은 한양조씨, 함양오씨, 안동권씨, 야성정씨, 반남박씨, 능주구씨, 영양남씨, 봉화금씨라 볼 수 있다. 1684년부터 작성된 집강안과 비교하면 한양조씨와 함양오시를 제외한 나머지 성씨들은 더 많은 인원이 입록되어 있다. 특히, 안동권씨는 34명, 영양남씨는 20명, 야성정씨는 10명, 능성구씨 14명, 영양김씨 5명, 봉화금씨 5명, 재령이씨 11명, 월성손씨 10명, 웅천주씨 7명이 증액되었다. 한편, 단양우씨는 이 집강안에서만 3명이 나타나고, 寧越辛氏는 나오지 않는다. 17세기에 작성된 두 집강안의 인물들 중 중복되는 자가 없기에 이들을 모두 합산하면 18세기 영양의 대표적 성씨들이 명확해진다. 한양조씨는 431명, 함양오씨는 154명, 안동권씨 72명, 야성정씨 44명, 영양남씨 42명, 능주구씨 40명, 영양김씨 37명, 봉화금씨․반남박씨 27명, 재령이씨 19명, 월성손씨 12명, 웅천주씨 9명, 단양우씨 3명 등으로 한양조씨가 압도적인 수적인 우세를 보여준다. 또한 이들은 상호간의 중첩적인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다.
영양남씨는 새로 입향한 세력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지역적 기반을 유지해 나간 반면, 여타 영양의 토성들은 그 세력이 쇠잔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 들어온 來姓들은 16세기에 대부분 입향 하였는데 대개 혼인에 의한 移住였다. 또한 읍지에는 나오지 않지만 16세기 전반에 寧海로 부터 英陽甘川에 이거한 樂安吳氏도 있었다. 낙안오씨는 향교 건립이전인 16세기 말의 英山書堂 건립에도 동참하고 있었으며, 18세기 말의 校案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17세기 말의 영산서원의 사액 청원시의 자료에서는 낙안오씨는 보이지 않으며, 19세기의 부교안에서도 이들을 찾을 수 없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남인이 정치적으로 축출된 갑술환국이 같은 해에 있었으며, 18세기 말에 낙안오씨들이 중심이 되어서 송시열을 제향하는 운곡영당의 건립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남인계 사족들과 극심한 마찰이 있었다는 점에서 낙안오씨는 갑술환국 이전부터 중립내지 노론계로 전향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영산서당 건립과 사액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17세기 초반까지 영양현의 토성인 영양남씨가 다른 성씨들에 비하여 족세가 우세하였지만, 17세기 중반이후 한양조씨, 함안오씨, 안동권씨 등의 來姓이 안착하면서 족원의 수가 늘고 있었으며, 서로 通婚하면서 족적 결속을 다져나갔다. 이외에도 새로이 봉화금씨, 단양우씨, 월성손씨 등이 18세기 초의 사액과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서 諸門中의 영양 移居도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집강안에서 1709년 이후 이들 성씨들이 새로이 등장하거나, 그 수가 늘어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한양조씨는 향교가 건립된 이후 계속해서 많은 수가 첨입되었고 있었는데, 같은 시기에 영양전역으로 그 세를 확장하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것은 한양조씨가 문과급제자와 생원, 진사 등을 많이 배출하면서 가능했던 것이며, 이러한 家格의 상승은 영양뿐만 아니라 안동, 봉화, 영해, 진보 등지로 통혼권을 확대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족세의 번성은 교안, 집강안 및 각종 上書 등에 참여하는 인원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자료는 18세기 영양현의 대표적인 사족들을 망라한 것으로서 시기별 사족들의 유입과 성장을 알려준다. 또한 집강안은 향교의 운영을 담당하는 校任으로서 이를 통해 영양 영양향교의 운영주체를 파악할 수도 있다. 즉, 이 집강안은 향촌사회의 변화 과정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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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사론 4, 조준호, 북악사학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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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