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4년 영양 영양향교 봉안시에 참석하였던 양반유생들의 명단인 집강안과 집사분정기 및 1688년까지의 大祭時 집사분정기를 함께 묶어 놓은 명부
내용 및 특징
이 자료는 1684년 영양 영양향교 건립시 참여한 유생들의 명단인 執綱案과 봉안시의 집사분정기, 1685년부터 1688년까지 매년 2월과 8월의 大祭時의 大祭執事分定記를 묶은 것이다. 현재 영양 영양향교에는 1684년에 작성된 執綱錄을 비롯하여 1684~1784년 집강록, 1723~1769년 집강록, 1890년부터~현재까지의 집강록 그리고 英山書院가 훼철되면서 옮겨진 것으로 보이는 영산서원의 집강안 등을 소장하고 있다. 執綱錄은 향교 유생의 職任錄으로서 執綱ㆍ校任ㆍ儒任ㆍ齋任등으로도 기록되고 있는데 같은 자료 속에도 한 가지 이름에 국한되지 않고 서로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영양현은 1413년에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영해의 속현이 되었다가 1676년에 邑民들이 復縣을 청하여 복설하였으나, 다음해에 다시 영해부로 이속시켰다. 1678년 邑民들의 요청으로 읍내면․동남면․덕봉면․수비면은 진보현에 移屬되었고, 청기면․석보면은 영해에 移屬되었다. 이후 1683년 邑民 南時稷 등이 진정하여 특명으로 復說하고 현감을 두고 독립시켰다. 이때 석보면은 계속 영해부에 영속시키고, 청기면은 영양에 환속하였다. 이후 석보면은 1906년에 영양군으로 다시 이속되었다. 이처럼 태종이후 오랜 기간 영해의 속현으로 존재하였던 영양현은 숙종대 복현이 되어서야 비로소 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1684년 향교가 건립되었다.
이 집강안은 17세기 말 당시의 영양내 대표적인 사족들을 대부분 망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1683년 영양이 복현되기 까지 향교 봉안에 참여했던 사족들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복현 요구가 이뤄졌으며, 이들 가문의 인물들 중 재경관인으로 나아간 자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영양 사족들의 복현 요구는 당시 主邑인 영해부의 강력한 반발로 수차례 좌절되었지만, 약 1세기동안 안동, 봉화, 진보, 영해 등지의 사족들과 通婚으로서 맺어진 족적 연대를 기반으로 復縣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처럼 복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영양사족 및 인근 고을의 관련 사족들은 이듬해 향교 봉안시에도 참석하여 이를 축하해 주었다. 봉안식에 참석한 유생들은 모두 143명이었다. 당시에 작성된 집강안에는 이들의 이름과 字, 생년, 거주지 등을 기록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 자와 생년이 생략된 경우도 있지만, 이들을 지역별로 구분해보면 영양 74명, 인근지역 유림 69명이다. 영양유림 중 67명은 거주지를 기록할 필요가 없기에 기록하지 않았지만, 7명(南氏 3명ㆍ禹氏 1명ㆍ鄭氏 1명ㆍ趙氏 2명)은 英陽이라 표기하고 있다. 이는 이름의 전후로 타 지역에서 온 성씨들이 기재되어 있기에 이들과 구분하기 위한 조처로 보인다. 이들 성씨들을 지역과 성별로 구분해 보면 영양의 경우 漢陽趙氏가 29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英陽南氏 11명, 咸陽吳氏 9명, 安東權氏 5명, 綾州具氏 4명, 奉化琴氏ㆍ丹陽禹氏ㆍ野城鄭氏 각 3명, 月城孫氏ㆍ載寧李氏 각 2명, 義城金氏ㆍ熊川朱氏ㆍ寧越辛氏 각 1명 순이었다. 이는 각종 지리지 및 읍지에 나오는 성씨들과 비교해 함으로써 이들 세력이 영양에서 갖는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寧海都護府조에 나오는 토성은 朴·金·黃·李·林·申이며, 속현인 英陽은 南·李·金·房(方), 靑杞縣의 續姓으로 兪·崔씨가 石保의 續姓으로 金氏가 있었다. 1832년경에 작성된 『慶尙道邑誌』의 영양현 姓氏條를 보면, 本縣의 성씨로 南, 金氏가 있으며, 來姓으로 漢陽趙氏, 咸陽吳氏, 綾州具氏, 奉化琴氏, 安東權氏, 野城尹氏, 野城鄭氏, 潘南朴氏, 月城孫氏, 竹山安氏, 丹陽禹氏, 熊川朱氏, 寧越辛氏 등이 있었다. 대개 읍지 등에 기재된 성씨들이 그 지역을 대표하는 양반사족들임을 감안한다면, 19세기 초 영양현을 대표하는 성씨들은 모두 15개였으며, 이중 13개가 來姓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들 성씨는 20세기 초에 작성된 『嶠南誌』에도 동일하게 기재되고 있는데, 이것은 영양의 대표적인 양반사족들이 큰 변화없이 지역사회를 주도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영양남씨는 새로 입향한 세력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지역적 기반을 유지해 나간 반면, 여타 영양의 토성들은 그 세력이 쇠잔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 들어온 來姓들은 16세기에 대부분 입향 하였는데 대개 혼인에 의한 移住였다. 또한 읍지에는 나오지 않지만 16세기 전반에 寧海로 부터 英陽甘川에 이거한 樂安吳氏도 있었다. 낙안오씨는 향교 건립이전인 16세기 말의 英山書堂 건립에도 동참하고 있었으며, 18세기 말의 校案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17세기 말의 영산서원의 사액 청원시의 자료에서는 낙안오씨는 보이지 않으며, 19세기의 부교안에서도 이들을 찾을 수 없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남인이 정치적으로 축출된 갑술환국이 같은 해에 있었으며, 18세기 말에 낙안오씨들이 중심이 되어서 송시열을 제향하는 운곡영당의 건립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남인계 사족들과 극심한 마찰이 있었다는 점에서 낙안오씨는 갑술환국 이전부터 중립내지 노론계로 전향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영산서당 건립과 사액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17세기 초반까지 영양현의 토성인 영양남씨가 다른 성씨들에 비하여 족세가 우세하였지만, 17세기 중반이후 한양조씨, 함안오씨, 안동권씨 등의 來姓이 안착하면서 족원의 수가 늘고 있었으며, 서로 通婚하면서 족적 결속을 다져나갔다. 이외에도 새로이 봉화금씨, 단양우씨, 월성손씨 등이 사액과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서 諸門中의 영양 移居도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한양조씨는 영양전역으로 그 세를 확장하는 한편, 문과급제자와 생원, 진사 등을 많이 배출하면서 영양을 대표하는 사족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영양뿐만 아니라 안동, 봉화, 영해, 진보 등지의 사족들과 혼맥을 넓혀 나갔으며, 이러한 족세의 번성은 교안, 집강안 및 각종 上書 등에 참여하는 인원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영양 영양향교 창건 시 참석한 인근지역 유림은 총 69명이다. 봉화를 비롯하여 순흥, 안동, 영덕, 榮川, 영해, 예안, 용궁, 울진, 진보, 함창 등 모두 12지역 이었다. 참여인원 순으로 보면, 예안이 25명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그 다음으로 안동 12명, 진보 9명, 영해 7명, 봉화 4명, 상주ㆍ순흥 각 3명, 榮川 2명, 영덕ㆍ용궁ㆍ울진ㆍ함창 각 1명 순이다. 한편, 타 지역 출신자 성씨 분포를 보면 金氏 22명, 李氏 12명, 權氏 10명, 琴氏 5명, 申氏 4명, 南氏ㆍ朴氏 각 3명, 郭氏ㆍ邊氏ㆍ徐氏ㆍ安氏ㆍ尹氏ㆍ鄭氏ㆍ洪氏ㆍ黃氏 각 1명씩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영양지역 사족과 통혼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안동ㆍ예안을 중심으로 진보ㆍ영해ㆍ봉화지역의 사족들이 대부분이었음은 이를 반증한다. 특히 김씨, 권씨, 이씨, 금씨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 안동임하 일대에 살고 있던 의성김씨의 경우 靑溪 金璡이 靑杞로 옮겨와 농장을 개설하여 상당한 부를 축척하기도 했으며, 영양에 왕래하면서 寓居하기도 했던 그는 英山書堂 건립을 주도 하였었다. 이후 그의 아들 藥峯 金克一이 英山書堂에 출입하면서 영양사족과의 관계가 계속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런 관계는 영양사족의 성장과 더불어 혼인관계로 발전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영산서당을 英山書院으로 陞院하였는데, 당시의 書堂長은 영해석보에서 영양首比山中에 은거하고 있던 載寧人 李時明이었다.
奉安時執事分定記는 1684년 11월 26일 賢儒의 奉安祭享때 집사분정기이다. 初獻은 縣監朴崇阜가 맡았다. 亞獻은 趙頍, 終獻은 李震操, 分獻은 金沔, 趙頙이 맡았다. 大祭執事分定記는 1685년부터 1688년까지 매년 2월과 8월의 대제 때 작성한 것이다. 향교 건립이후 獻官은 대부분 한양조씨가 담당하였으며, 영양남씨와 함양오씨, 의성김씨, 재령이씨 가문에서 執事를 담당하였다. 특히 趙德鄰, 趙德純 형제는 이 시기에 科擧에 급제하여 家格을 더 높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인근 사족들과 교류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런 노력은 결국 한양조씨가 鄕校운영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또한 이를 바탕으로 향촌사회를 영도하였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자료는 17세기 영양현의 대표적인 사족들을 망라한 것으로서 향교의 건립에 참여한 세력을 알려준다. 집강안은 향교의 운영을 담당하는 校任으로서 이를 통해 영양 영양향교의 운영주체를 파악할 수도 있다. 즉, 이 집강안은 향촌사회의 변화 과정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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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96
북악사론 4, 조준호, 북악사학회, 1997
漢陽趙氏大同世譜, 한양조씨대동세보편찬위원회, 뿌리문화사, 2003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