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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4년 영양향교(英陽鄕校) 집강안(執綱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3+KSM-XG.1684.4776-20110630.Y1111303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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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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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주체 영양 영양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 128
작성시기 1684
형태사항 크기: 37 X 24
판본: 필사본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양 영양향교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양 영양향교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향교길 22-20

관련자료

안내정보

1684년 영양향교 집강안
이 자료는 1684년부터 1784년까지 1백년간 작성한 양반유생들의 명부인 집강안이다. 이 집강안은 당해 연도마다 추입되는 인물을 기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시기적으로 다른 집강안과 중복되지만 등재인물은 중복되지 않는다. 집강안은 향교의 所任을 맡고 석전제에 참석하였던 향중 사족의 직임록으로 일반적으로 교임록을 말한다. 그러나 이 집강안에는 직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실제 이 집강안에 나오는 434명의 인물들 중 조씨가 230명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다음으로 오씨 73명, 김씨 19명, 권씨 18명, 정씨·박씨 16명, 구씨·남씨 13명, 금씨 12명 등의 순이었다. 읍지에 나오는 성씨를 그대로 신빙한다면 이들의 본관은 한양조씨, 함양오씨, 안동권씨, 야성정씨, 반남박씨, 능주구씨, 영양남씨, 봉화금씨라 볼 수 있다.
향교가 건립될 당시 집강안에는 모두 30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조씨, 오씨, 권씨, 남씨, 금씨, 박씨 들로서 봉안시에 참석했던 영양유생들의 명단에서도 동일인이 보이고 있다. 영양향교가 건립된 후 처음 그 운영에는 풍양조씨가 주도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들은 세습적으로 그 직을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1709년 이전까지는 구씨 1명, 신(申)씨 1명, 신(辛)씨 1명, 오씨 5명, 정씨 1명, 남씨 1명, 금씨 1명, 박씨 1명 만이 첨입되었지만, 조씨는 28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직은 세습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709년 이후 첨입되는 인원은 급격히 증가하지만, 여전히 조씨와 오씨가 타 성씨에 비하여 많이 첨입되고 있었다. 이는 향교에 참여하는 인원이 많은 만큼, 많은 수의 인원이 연령제한, 作故 등의 사유로 집강안에서 빠지고 그 자리가 족친에게 이어졌던 것이다. 이외에도 권씨, 김씨가 기존의 등재 성씨와 함께 이후 꾸준하게 첨입되고 있다. 1세기 동안 새로 들어온 성씨는 류씨, 송씨, 신(申)씨, 장씨, 홍씨, 주씨가 있으며, 5명 미만이 첨입된 성씨로는 성씨, 손씨, 신(辛)씨, 윤씨, 이씨가 있었다. 즉, 이들 성씨는 18세기 중반까지 영양에 새로 들어오거나, 이전에 들어왔지만 크게 성장하지 못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 들어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는 집안으로는 구·권·금·김·남·박·정씨를 들 수 있다. 이중 영양의 토성으로는 남씨와 김씨를 들 수 있다.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영남대출판부, 1979
慶北鄕校誌, 慶尙北道·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경상북도,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 Ⅰ,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영남대 출판부, 1992.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96
英陽郡誌, 영양군지편찬위원회, 중외출판사, 1970
북악사론 4, 조준호, 북악사학회, 1997
漢陽趙氏大同世譜, 한양조씨대동세보편찬위원회, 뿌리문화사, 2003
이병훈

상세정보

1684년 5월부터 1784년 3월까지 작성된 英陽鄕校 兩班儒生들의 명단인 執綱案
내용 및 특징
이 자료는 1684년부터 1784년까지 작성한 양반유생들의 명부인 執綱案이다. 이 집강안은 당해 연도마다 추입되는 인물을 기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시기적으로 다른 집강안과 중복되지만 등재인물은 중복되지 않는다. 집강안은 향교의 所任을 맡고 석전제에 참석하였던 향중 사족의 직임록으로 일반적으로 교임록을 말한다. 그러나 이 집강안에는 職任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영양현1413년에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영해의 속현이 되었다가 1676년에 邑民들이 復縣을 청하여 복설하였으나, 다음해에 다시 영해부로 이속시켰다. 1678년 邑民들의 요청으로 읍내면동남면덕봉면수비면진보현에 移屬되었고, 청기면석보면영해에 移屬되었다. 이후 1683년 邑民 南時稷 등이 진정하여 특명으로 復說하고 현감을 두고 독립시켰다. 이때 석보면은 계속 영해부에 영속시키고, 청기면영양에 환속하였다. 이후 석보면1906년에 영양군으로 다시 이속되었다. 이처럼 태종이후 오랜 기간 영해의 속현으로 존재하였던 영양현숙종대 복현이 되어서야 비로소 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1684년 향교가 건립되었다.
이 집강안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 말까지 100년간 작성되었는데, 당시의 영양내 대표적인 사족들을 대부분 망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기재된 유생들은 모두 20개 성씨, 434명으로 이들의 이름만이 기록되어 있어서 정보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들 성씨들의 添入현상을 시기별, 성씨별로 살펴보면 영양내 사족들의 족세와 새로운 성씨의 도래 등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이들 성씨는 각종 지리지 및 읍지에 나오는 성씨들과 비교해 함으로써 영양에서 갖는 위치를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 英陽의 토성은 南·李·金·房(方)이며, 靑杞縣의 續姓으로는 兪·崔씨가 石保의 續姓으로는 金氏가 있었다. 1832년경에 작성된 『慶尙道邑誌』에서는 토성으로 南, 金氏가 남아 있으며, 來姓으로 漢陽趙氏, 咸陽吳氏, 綾州具氏, 奉化琴氏, 安東權氏, 野城尹氏, 野城鄭氏, 潘南朴氏, 月城孫氏, 竹山安氏, 丹陽禹氏, 熊川朱氏, 寧越辛氏 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개 읍지 등에 기재된 성씨들이 그 지역을 대표하는 양반사족들임을 감안한다면, 19세기 초 영양현을 대표하는 성씨들은 모두 15개였으며, 이중 13개가 來姓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들 성씨는 20세기 초에 작성된 『嶠南誌』에도 동일하게 기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계속해서 지역사회를 주도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실제 이 집강안에 나오는 434명의 인물들 중 趙氏가 230명으로 절반이상을 차지하며, 다음으로 吳氏 73명, 金氏 19명, 權氏 18명, 鄭氏·朴氏 16명, 具氏·南氏 13명, 琴氏 12명, 등의 순이었다. 읍지에 나오는 성씨를 그대로 신빙한다면 이들의 본관은 한양조씨, 함양오씨, 안동권씨, 야성정씨, 반남박씨, 능주구씨, 영양남씨, 봉화금씨라 볼 수 있다. 향교가 건립될 당시 집강안에는 모두 30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조씨, 오씨, 권씨, 남씨, 금씨, 박씨 들로서 봉안시에 참석했던 영양유생들의 명단에서도 동일인이 보이고 있다. 영양향교가 건립된 후 처음 그 운영에는 풍양조씨가 주도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들은 세습적으로 그 직을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1709년 이전까지는 구씨 1명, 申氏 1명, 辛氏 1명, 오씨 5명, 정씨 1명, 남씨 1명, 금씨 1명, 박씨 1명 만이 첨입되었지만, 조씨는 28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직은 세습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709년 이후 첨입되는 인원은 급격히 증가하지만, 여전히 조씨와 오씨가 타 성씨에 비하여 많이 첨입되고 있었다. 이는 향교에 참여하는 인원이 많은 만큼, 많은 수의 인원이 연령제한, 作故 등의 사유로 집강안에서 빠지고 그 자리가 족친에게 이어졌던 것이다. 이외에도 권씨, 김씨가 기존의 등재 성씨와 함께 이후 꾸준하게 첨입되고 있다. 1세기 동안 新參한 성씨는 柳氏, 宋氏, 申氏, 張氏, 洪氏, 朱氏가 있으며, 5명 미만이 첨입된 성씨로는 成氏, 孫氏, 辛氏, 尹氏, 李氏가 있었다. 즉, 이들 성씨는 18세기 중반까지 영양에 새로 들어오거나, 이전에 들어왔지만 크게 성장하지 못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 들어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는 집안으로는 具·權·琴·金·南·朴·鄭氏를 들 수 있다. 이중 영양의 토성으로는 남씨와 김씨를 들 수 있다.
영양남씨는 새로 입향한 세력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지역적 기반을 유지해 나간 반면, 여타 영양의 토성들은 그 세력이 쇠잔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 들어온 來姓들은 16세기에 대부분 입향 하였는데 대개 혼인에 의한 移住였다. 또한 읍지에는 나오지 않지만 16세기 전반에 寧海로 부터 英陽甘川에 이거한 樂安吳氏도 있었다. 낙안오씨는 향교 건립이전인 16세기 말의 英山書堂 건립에도 동참하고 있었으며, 18세기 말의 校案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17세기 말의 영산서원의 사액 청원시의 자료에서는 낙안오씨는 보이지 않으며, 19세기의 부교안에서도 이들을 찾을 수 없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남인이 정치적으로 축출된 갑술환국이 같은 해에 있었으며, 18세기 말에 낙안오씨들이 중심이 되어서 송시열을 제향하는 운곡영당의 건립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남인계 사족들과 극심한 마찰이 있었다는 점에서 낙안오씨는 갑술환국 이전부터 중립내지 노론계로 전향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영산서당 건립과 사액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17세기 초반까지 영양현의 토성인 영양남씨가 다른 성씨들에 비하여 족세가 우세하였지만, 17세기 중반이후 한양조씨, 함안오씨, 안동권씨 등의 來姓이 안착하면서 족원의 수가 늘고 있었으며, 서로 通婚하면서 족적 결속을 다져나갔다. 이외에도 새로이 봉화금씨, 단양우씨, 월성손씨 등이 18세기 초의 사액과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서 諸門中의 영양 移居도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집강안에서 1709년 이후 이들 성씨들이 새로이 등장하거나, 그 수가 늘어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한양조씨는 향교가 건립된 이후 계속해서 많은 수가 첨입되었고 있었는데, 같은 시기에 영양전역으로 그 세를 확장하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것은 한양조씨가 문과급제자와 생원, 진사 등을 많이 배출하면서 가능했던 것이며, 이러한 家格의 상승은 영양뿐만 아니라 안동, 봉화, 영해, 진보 등지로 통혼권을 확대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족세의 번성은 교안, 집강안 및 각종 上書 등에 참여하는 인원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자료는 18세기 영양현의 대표적인 사족들을 망라한 것으로서 시기별 사족들의 유입과 성장을 알려준다. 또한 집강안은 향교의 운영을 담당하는 校任으로서 이를 통해 영양 영양향교의 운영주체를 파악할 수도 있다. 즉, 이 집강안은 향촌사회의 변화 과정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영남대출판부, 1979
慶北鄕校誌, 慶尙北道·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경상북도,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 Ⅰ,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영남대 출판부, 1992.
英陽郡誌, 영양군지편찬위원회, 중외출판사, 1970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96
북악사론 4, 조준호, 북악사학회, 1997
漢陽趙氏大同世譜, 한양조씨대동세보편찬위원회, 뿌리문화사, 2003
이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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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4년 영양향교(英陽鄕校) 집강안(執綱案)
趙 䪳
南翼漢 年滿
趙 顃 年滿
吳以謙
權斗夏 年滿
南翼河 年滿
吳三省 年滿
趙壽衡
吳三重
趙 䫆
趙壽南 年滿
吳三益
趙德培 年滿
趙 䫨 年滿
權應銓 年滿
趙壽益 年滿
朴世鉉 年滿
趙 頧
趙德淵 年滿
吳三說
趙是昌 年滿
吳三聘
趙是常 年滿
趙壽天 年滿
趙壽彬 年滿
趙 ? 年滿
琴 紏 改 世昱
權載一
權德周
吳學曾 年滿

甲子五月 日
具 侙
趙是剛 年滿
趙德亨
吳三慎 改 三命 年滿
趙壽崗 改 壽康 年滿
鄭時玄 年滿
吳三近 年滿 改 三達
申世重
趙德臣 年滿

丁卯二月 日
趙明璧 改 ? 年滿
吳學明 年滿
趙是光 入格

戊辰二月 日
申渭望 年滿
趙德久 入格
趙是明 年滿
趙是璧 年滿
趙奎徵 改 重呂 改 祳 年滿

庚午二月 日
趙德賓 年滿
趙德壽 年滿

甲戌十一月 日
權德齡 年滿
趙應璧 改 瑗 年
趙德溫
趙喜命
趙錫圭
趙是錫 年滿
趙壽春 改 壽璧 年滿
趙德? 趙是完 年滿

丙子 四月 日
趙壽海 年滿
丙子八月 日
趙是天
趙壽龜 久 年滿
戊寅三月 日
朴慎五 年滿
趙重圭
吳學周 年滿
南德明
趙袿
趙喜堂
壬午閏六月 日
趙玾 年滿
吳學聖 年滿
琴大夏

己丑四月 日
趙是元
趙希曾
趙褆
趙喜常
趙大圭
趙是大
吳學泰

趙璋
鄭錫九
具道三
權德秀
趙襑
朴敬五
趙壽台
金景昌
趙漢璧
趙鏜
趙裀
吳學時
吳學山
趙褘
趙完璧
鄭礥
趙世㣧 年滿
南五明
趙是鼎
趙壽錫
趙晉圭 年滿
趙信圭
趙喜?
趙璛

壬辰七月二十日
吳學閔 年滿
趙壽奎 年滿
吳學哉 年滿
孫景復 年滿
吳學麟
吳泰昌 年滿
趙喜望 年滿
琴鳴夏
趙復圭
吳處大
金東運
趙至道

庚子八月十二日
具重三 年滿
趙和璧 年滿
宋履貞
金警鐸 年滿
趙執圭
趙喜采
吳受大 改 濟大
吳學仲
趙喜謙
趙伯圭
鄭錫三 年滿
趙重泰 年滿
趙瑾 年滿
朴瑞五 年滿
趙匡道
趙?道
權昌遠
鄭碤
趙瑞圭
具聃壽
趙舜圭
趙弘道
鄭錫五
趙瑢

辛丑二月七日
趙裺
朴惇五
吳學智 年滿
金始鏜 年滿
洪胃咸
趙希程
鄭宜琛
趙錫麟
趙?圭
金瑞玄
趙喜復
趙尙泰
趙重鐸
吳學臨
趙珖 年滿
李斗煥
李亨葆
權萬正
趙錫儀
南泰明
朴成五
張夢相 年滿
趙是䢖
趙希閔
趙凝道
趙觀圭

丙午二月 日
趙喜泰
趙文圭
趙喜濟
趙耕道
趙敏道
鄭泰蓮
柳義和
尹思述
趙? 故
趙尙益
趙賁圭
趙夏圭 改 相圭
辛味玄
趙謙圭
吳致大
權翔 故
吳時大
吳道大

庚戌二月 日
金巑
權後行
吳有大
金東遠
趙希夙
趙承圭
趙喜益
金應晶 改 應鼎 故
金檍
朴宗絅
趙奉圭
趙喜載
趙五圭 改 用圭
趙尙弘
趙 ? 改 ?

甲寅三月 日
吳學標
成夙寅
南國冕
趙和圭
權復來
金應鉉
具聃命
趙褒
趙宗周
趙希洙
趙重鋽
琴昌烈
趙琛
趙泰來
趙詠道
趙仁居
趙如圭
趙喜晉 改 喜節 故
吳相鎬
趙遵道
李遠馦
朴道絅
趙相采
趙敬居
趙尙沆
趙康圭
趙尙文 改 尙敬
趙尙哲
金瑞胃
金復行
吳成大
趙錫老

丁巳三月 日
趙明道 改 鳴道
權復行
吳弼大 改 四大
吳命岳
趙一圭
趙封圭 改 達圭
趙敬圭
趙觀福
趙尙敏
琴慶夏
琴尙夏
趙祥圭 改 雲圭 故
朴亨復 改 處絅
趙重道
吳命鎬
吳宅鎬
趙裒
趙玄道
吳命義
吳尙大
吳慶大
吳昌大

辛酉八月 日
趙性道
趙燮陽
鄭德川
趙居昜
趙運道
趙龍道
趙居洵 改 居黙
趙元禧 改 潤臣
趙純道
吳始鎬
吳命觀
丁卯十一月
朴時幹
趙達道
權重行
具喜朝
成㳙
吳漢大
朴思絅
南雲翰
趙宅東
成洁 改 活
趙近道
趙三圭
趙信道
趙進道
琴達夏
趙尙欽
趙尙信
朴受絅
趙行道
趙承道
趙居寬
吳命揆
趙尙郁
吳振鎬
南世欽
金弘亮
金尙澤
趙觀周
鄭世達
趙得圭
吳命軾
趙重禧 改 濟臣 故
趙沃臣
具孝源
孫景命
趙襂

庚午二月 日
琴舜夏
趙述道

庚辰正月 日
權景行
趙希卨
趙宅一 改 恒采
鄭道淵
鄭德泌
南承萬
吳憲大
吳亨大
趙觀道
趙潤道
趙尙龍
趙尙純
成 潑
趙居誼
朴履泰
吳守溫
具?源
權賁來 改 國賓
具弼朝
具頧朝
趙演道
趙適道 移居
趙觀璧
趙尙麟
趙尙鏞
趙尙龜
趙尙珩
趙載道
趙尙一
尹纘
吳守澐
辛以馥
金尙源
趙城圭
南程萬
趙存道
趙逸道 改 衡道
趙居廣
吳柱大
趙居元
趙居簡
吳道洞
金始龍 移居
吳英大

庚辰正月 日
權昌孝
李龜祚 移居
鄭世觀 德觀
吳翊鎬
具儀朝
吳觀鎬
吳顯大
趙貫道
趙觀韶
吳秀漢
趙居安
趙居善
趙性復
琴興績
趙安孝
趙鼎復
朴來泰
金光湜
趙匡勳
趙尙欽
趙亨復 改 仁復
成彦霖 移居
趙隣臣 改 一臣
趙匡臣
趙宅邠
趙天周
吳賁大
吳守瀗
吳邦大
趙昌周
趙宅漢
具翼朝
趙尙麒
趙命禹
趙泰彬
鄭惠相
朴來喆
權昌雄
吳規大
吳東顯
琴凞績
鄭東潤
朱璨
吳姬大
金世檏 改 慶運 移
吳鼎鎬
趙觀?
吳命曄
趙藺圭
權正軾
吳守弘
權昌純
具暹
金柱燮
南宗翰
吳佑大
趙觀亨
趙尙復
趙尙鑌
趙居震
趙匡殷
吳楨漢
趙衡臣
權昌德
南行萬
吳守謙
吳行大
琴光績
趙臣孝
孫以達
趙敦復 改 命復
權䢖中

丙戌十月 日
尹思?
南萬福
趙居吉
鄭東赫
趙居汴 改 居强
趙尙魯 改 尙海
趙居陽
趙宅道
趙漢道
吳龜協
朴東相
趙秤道
吳守約
吳道汲
趙永復 改 重復
吳宗漢
琴星績 改 薰績

辛卯九月 日
鄭仁復
甲午四月 日
趙居信
趙虎臣
甲辰二月初一日
趙崇道
甲辰三月初一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