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9년(英祖 45) 4월에 安東에 사는 固城李氏 문중의 李宗漢이 慶尙道觀察使에게 올린 山訟 관련 議送이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安東에 살고 있는 喪人 李宗漢. 삼가 所志를 올리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금년에 16세입니다. 극심한 변란을 겪은 이후로 원통함을 안고 병이 생겼습니다. 그래도 한 가닥 목숨을 부지하고 있기에 이 원수를 반드시 갚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일전에 議送을 올렸던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문서의 앞부분을 통해 李宗漢의 신상을 알 수 있다. 우선 그는 安東의 固城李氏 문중 사람으로 현재 16세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喪人’이라고 적고 있다. 李宗漢은 대체 어떤 극심한 변란을 겪었기에 반드시 원수를 갚으려 한다는 것일까. 다음 문장을 읽어보자.
"죽은 아버지가 구천에서 화를 입었으니, 이 얼마나 깊은 원수입니까. 그런데도 저는 병 때문에 길바닥에서 죽어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당연히 불효를 저지른 죄를 받아야 하지만, 관찰사께서 큰 형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특별히 關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金復源을 잡아 가두게 하였느니, 지금에서야 저의 하늘에 닿는 원한을 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李宗漢이 당한 변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그의 아버지가 구천에서 화를 입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李宗漢이 스스로를 ‘喪人’이라 칭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죽어서 상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과정에 방해를 받았거나 무덤에 위해를 입는 변을 당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원수를 갚을 대상으로 ‘金復源’이 등장하고 있다. 즉 앞 문단에서 ‘일전에 議送’을 관찰사에게 올렸다고 하고 있는데, 그 議送을 통한 요청에 따라 관찰사는 金復源란 자를 옥에 가두도록 안동부사에게 지시한 것이다.
즉 현재는 관찰사가 安東府使에게 지시하여 金復源을 잡아 가둔 상황이다. 그러나 金復源 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아직 말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미 사건이 일단락되었음에도 李宗漢은 "저는 숨을 겨우 쉬는 중에도 나도 모르게 각성해 일어나 이렇게 병든 몸을 이끌고 와서 감히 다시 호소합니다. 바라건대 관찰사께서는 다시 살펴주십시오."라고 하여, 아직 金復源에 대한 처벌에 만족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앞서 말한 ‘죽은 아버지가 구천에서 입은 화’가 무엇이었는지 점점 궁금해진다.
그런데 李宗漢은 이어지는 본문에서 金復源이 아닌 金履源이 얼마나 간사한 사람인지 다음과 같이 늘어놓고 있다.
"저 金履源은 간사한 胥吏입니다. 그 사람됨은 충분히 말로 거짓을 꾸밀 수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의 族黨은 本府(安東관아)에 자리 잡고 웅거하여 맘대로 간사한 짓을 행하면서, 남을 속이고 무고하는 것이 습관이 된 자들입니다. 이러하니 그 거짓을 진정 캐내는 것이 어떻게 실제 가능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여기서 金履源을 비난하는 것은 李宗漢이 겪은 변란에 그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들은 本府 관아를 꽉 잡고 있기 때문에 安東 고을 안에서는 그들의 간사함을 들춰서 바로잡기 어렵다고 하고 있다. 또한 여기서 金履源과 金復源은 서리 집안으로 안동관아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 李宗漢이 당한 일이 무엇인지는 말하고 있지 않다. 문서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金復源이 저지른 일과 金履源을 처벌해야 하는 이유를 언급하고 있다.
"金履源이 저지른 무고로 인해 제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라고 하시는데 그럴 수 없습니다. 禍가 아버지의 분묘에 미쳤고, 門族에게 형이 가해졌으니, 이는 지극히 원통한 일입니다. 이는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니, 한 하늘을 같이 받치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즉 아버지의 분묘가 입은 화변은 金履源의 무고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문중 사람들에게 형벌까지 가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金復源이 구타한 죄를 생각해보면, 서리가 양반을 범해서 사경에 이르게 했으니, 이는 정말 3백년간 없었던 극변입니다. 金復源이 어찌 법의 처벌을 면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비록 정범은 金復源이지만, 그에게 죄를 범하게 시킨 자는 金履源입니다. 즉 金履源이 根本이고 金復源은 枝葉입니다. 枝葉인 金復源을 처벌하는 것은 당연하되, 根本인 金履源은 어지 용서할 수 있습니까. 저의 깊은 원한은 아버지의 분묘를 파낸 것과 刑이 一門에 처해져 아직도 상처가 낫지 않고 있는 것에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 李宗漢의 말을 통해 유추해 보면, 金復源이 지금 安東府의 감옥에 갇혀 있는 이유는 그가 양반을 구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외에도 李宗漢은 아버지의 분묘가 파헤쳐지고, 일족이 형을 받아 크게 다친 일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金履源의 무고 때문에 발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金履源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李宗漢이 관찰사에게 다시 호소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李宗漢은 마지막으로 孟子의 말을 인용하여 ‘匹夫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李宗漢의 요청에 대해 관찰사는 27일에 처결을 내리길, "이송된 소송의 이치는 잠시 놔두고 논의하지 말라. 상민이 양반을 구타한 죄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감영에서 스스로 처리할 것이다. 번거롭게 소송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즉 관찰사는 또 다시 金復源의 처벌만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안은 놔두라 하고, 번거롭게 더 이상 소송하지 말 것을 지지하고 있다.
한편 李宗漢의 所志 내용을 보면, 문장은 간절하고 강하지만 상대방의 죄상을 자세히 논증하고 있지는 않다. 이는 이미 여러 번 진행된 소송이기 때문에 관찰사도 그 내용을 알 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李宗漢이 당한 화변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그가 말하고 있는 ‘하늘에 닿는 지극한 원한’은 固城李氏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다른 문서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즉 그가 감영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작성한 原情 2건[1769년 이종한(李宗漢) 원정(原情)-1,2]과 固城李氏 문중의 누군가가 작성한 사건개요[1769년 안동(安東) 이종한(李宗漢) 산송 사건 개요(山訟梗槪)]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