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9년(英祖 45) 安東에 사는 固城李氏 문중의 李宗漢이 慶尙監營의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올린 原情의 초본이다. 수취자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慶尙道觀察使 또는 安東府使에게 올린 것으로 보인다.
이 原情에서 李宗漢은 金履源 집안과 벌인 山訟 관련 분쟁에서 발생한 사건의 개요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당시 양자간의 山訟은 서로 구타하는 사태까지 확대되어 李宗漢이 감영에 압송되기에 이른 것이다.
먼저 양자 간에 어떠한 산송이 벌어졌는지 살펴보자. 李宗漢은 소송의 상대방인 金履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저 金履源은 胥吏의 종자로서 간교하기가 비길 대가 없고, 속이고 무고하는 것이 버릇인 놈입니다. 그리고 그의 족당은 감영과 本府에 웅거하고 있으면서, 도모할 바가 있으면 몰래 손을 써서 흉악한 짓을 자행합니다. 몇 년 전에 그의 어머니를 장사지낼 때에는 산 아래 사는 백성들이 금단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金履源은 관아에 오가면서 백방으로 모함하여, 양반 3명은 유배가게 하고 상민70여명은 곤장을 맞게 했습니다. 그 이후로 점점 전횡하여 못하는 것이 없었고, 지금에 이른 극한 일도 생겼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처음에 산송이 진행된 경과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처음에 제가 入葬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金履源이 그곳이 그의 어머니 무덤의 아래라고 칭하면서 爭訟을 벌였습니다. 이에 관아에서 조사하여 지형을 측량한 결과, 거리는 1백 13보 떨어져 있었고 두 무덤이 위아래 위치하고 있어 앉으나 서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이에 관아에서 법에 따라 장사 지내는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관의 처결에 따라 운구하여 墓壙을 만들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梨谷은 지금의 안동 남선면 이천리이다. 이곳을 둘러싼 산송에서 李宗漢이 승소한 것이다. 그러나 葬日 전날 저녁부터 당일 저녁까지 커다란 소동이 발생한다. 우선 李宗漢의 설명을 통해 葬日 전날부터 장일 낮까지의 사건을 살펴보자.
"그런데 葬日 전날 저녁에 金履源은 관아에 들어가서는 移訟을 요청하는 訴狀을 내면서 말하길, ‘여기 있는 宣樂堂은 수령의 초당도 아닌데, 왜 백성의 산지를 빼앗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韓 수령께서 대노하여 말하길, ‘네가 어찌 고을 수령을 능욕하는가.’라고 하고 형틀[枷]을 씌우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金履源은 형틀을 내치고 머리를 흔들어 쓰지 않고 관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바로 노복을 다수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가서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형제는 墓壙에 가로누워서 칼을 뽑아 상질을 부렸고, 役夫들은 발도 못 붙이게 했습니다. 저의 숙부인 李弘輔가 급히 관아에 고하였고, 이에 힘입어 장사를 치렀습니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金履源이 소송결과에 불복하여 固城李氏 문중이 장사를 방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葬日 저녁에 일어난 소란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자.
"이날 밤 저희 집의 늙은 노복 여러 명이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법을 멸시하고 葬事를 禁 했다는 말로 金履源을 힐책했습니다. 그러다가 도리어 金履源의 무리에게 짓밟히고 찔리고 맞아 온몸에 피를 흘리고 기절하여 땅에 쓰러졌습니다. 우리 늙은 노복의 처는 金履源의 6촌 祖母인데, 집에서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그의 남편이 金履源의 손에 죽은 줄로 알고, 그의 자식과 조카 두 명을 데리고 관아에 고하기 위해 읍내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金履源의 집 문전에서 말하기를, ‘金履源은 나의 至親이면서 내 남편을 죽였다. 내 당장 그 집에서 죽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부짖으며 들어가서는 발악하고 욕을 하며 솥뚜껑 2개와 水盆 1개를 부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날 밤 李宗漢의 노복들이 金履源의 집에서 소란을 피웠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金履源도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 李宗漢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金履源의 6촌인 金達源은 이때 鎭營의 陪吏였습니다. 그는 禁夜軍을 시켜 저희 노복의 자식와 조카를 결박하고 鎭營에 바치며 ‘이들은 명화적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시비곡직을 따지지도 않고 足杖을 치고 주리를 틀고는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물건 값을 생으로 받아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李宗漢은 金履源이 安東府와 감영에 조치를 취했다고 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그리고는 本府에 誣訴하기를, ‘李宗漢와 그의 諸族이 산 위에서 그들[金履源형제]를 때렸고, 또 노복 30여명을 이끌고 와서 집 안의 물건을 때려 부수고 약탈해가서 남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鎭營을 부추겨서 監營에 보고하게 하기를, ‘李宗漢이 약탈해간 재물로 그의 아버지를 厚葬하려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李宗漢은 金履源이 벌인 무고가 근거 없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는 16세의 고아로서 이러한 아버지를 잃는 겪은 터라, 혼백이 나가 어지할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겨를에 저 무서운 소송상대방[訟隻]을 손으로 때리겠습니까. 그리고 어찌 아버지의 광곽을 두고 산을 내려와서 수 십리 떨어져 있는 訟隻의 집을 부수고 도적질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다른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祭需品을 마련하여 다음날 아침의 아버지 葬事에 사용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라고 하였다.
李宗漢은 이상과 같이 아버지의 葬日에 일어난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한편 이 사건 이후 또 사건이 발생했는데, 李宗漢의 9촌 숙부가 金復源에게 구타당한 일이다. 李宗漢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저의 9촌 숙부인 李弘弼은 마침 그때 일이 있어서 읍내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金履源의 동생 金復源가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숙부를 말 아래로 잡아끌고 머리를 풀어 잡고 끌고 다니면서 ‘너도 李宗漢의 李氏구나.’라고 하며 무수히 난타하였습니다. 성내의 사람들이 모두 보았지만 아무도 어찌하지 못하였는데, 官校 한명이 구해주어 경각에 달린 목숨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아 (우리 집안이 자리 잡은)지난 삼백년간 名分의 고을에서 이런 변괴가 있었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이런 일을 관아에 고발하였다. 그러나 李宗漢의 말에 의하면, 도리어 金復源 집안의 공작으로 가문 사람들이 화를 당하게 된다.
"李弘弼의 從弟인 李弘檝는 달려가 관아에 呈訴했습니다. 그리고 또 사유를 갖추어 감영에도 呈訴했습니다. 그런데 監營에서는 도리어 訴狀 뒷면에 關을 작성하여[背關] 바로 本府[安東]에 보내어 金復源을 가두지 말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金履源은 좋아 날뛰면서 감영에 訴狀을 올리기를 무고하는 말을 남김없이 꾸며댔습니다. 이에 우리 문중 친족 중에 참소를 당한 자가 8명이 이르렀습니다. 일일이 감영의 옥에 갇혔습니다."
이상과 같이 문중 사람 8명이 도리어 감영에 투옥되었고, 이어서 李宗漢도 감영에 투옥되게 되었다. 李宗漢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는 가만히 앉아서 誣告를 당할 수 없었기에 감영에 訴狀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감영에서는 우리 노복을 형을 가하여 추고하고는, 訴狀 뒷면에 關을 작성하여 本府에 바로 보내어 저의 아버지 분묘를 3일 내로 파내도록 하였습니다. 군인들과 서리, 장교들이 산에 가득하게 왔고, 차가운 날씨에 딸은 얼어있었는데 분묘는 편편히 부수어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감영에서 온 上使가 급하게 독촉하여, 화가 지하에까지 미치는 이 날에 형틀을 쓴 채로 감영으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원정 본문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李宗漢은 아버지의 분묘를 파내는 것에 저항하다가 결국 감영의 투옥된 것이다.
李宗漢은 이상과 같이 山訟이 벌어진 이후에 일어난 사건을 자신의 관점으로 서술하여 安東府使에게 고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가문이 당한 화변을 말하고 있다.
"저는 삼대독자로서 형제가 없습니다. 집에서는 병든 어머니가 밤새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至親은 모두 화변에 걸려들었습니다. 2명은 감영에서 장 20대를 맞았고, 1명은 의성에서 한차례 嚴刑을 당했고, 4명은 청송에서 장 30대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가문의 노비 주인인 저는 죽고 싶어도 그렇게 못하다가, 아버지의 광곽을 주인 없이 산 밑에서 밤낮으로 이슬을 맞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람의 도리가 이렇게 까지 되었기에 바로 죽어버리고 싶지만, 무지하고 질긴 목숨을 끊지 못했습니다. 화변이 더욱 커져 열흘 이내에 上使가 두 번이나 나왔습니다. 올해 설날은 죽은 아버지의 初祥日인데, 상주인 저는 집에서 제사도 못 지내고 반대로 수 백리 떨어진 감영에 있으니, 이러한 처지를 어찌 말로 다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金履源의 행태를 말하면서, 잘 살펴주기를 청하고 있다.
"저 金履源은 홀로 득의하여 마음대로 우리 아버지 무덤을 파낸 곳에 무덤을 두었습니다. 그가 法理에 어긋나는 것은 이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설령 제가 실제 재물을 훔치는 일이 있더라도, 불초한 자식의 죄가 묵은 아버지에게 미치는 것은 부당합니다. 죽은 아버지의 광곽이 아직 얕은 흙에 있습니다. 바라건대, 公案을 다시 잘 살펴보시고 법에 따라 처단하여 억울한 원한을 풀어주십시오."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