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3월, 유학 김창섭 외 40이 풍북면성조동 선산 근처에 투장한 분묘에 대해 조속히 처리해 줄 것을 안동군수에게 연명으로 재촉구한 문서
내용 및 특징
이 문서는 幼學 金昌燮 등 豊山 김씨 41인이 선산 근처에 투장한 분묘를 파가게 해 줄 것을 안동군수에게 재요청한 上書이다. 상서의 대표자는 유학 김창섭이고, 풍산 김씨 40인이 연명하였다. 이들 풍산 김씨는 1896년 7월에 이미 안동군수에게 투장묘를 파가게 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당시 안동군수가 바뀌면서 처리가 늦어졌다. 안동군수의 부재로 宣諭御使에게 다시 상서했지만 신임 군수가 오기를 기다리라는 題辭가 내려져 풍산 김씨들은 7개월이 지난 이때에 와서 안동군수에게 다시 상서한 것이다. 안동군에서는 3월 18일에 문서를 접수하여 “어사의 제사에 따라 督掘하도록 해야 하지만 무덤 주인도 모르는데 어찌 이장할 수 있겠는가? 도형을 그려 오라”는 제음을 내렸다. 도형은 산송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공정한 판결을 위하여 작성된 분쟁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김창섭 등이 안동군수에게 투장한 곳의 점유권이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 근거로 내세운 것은 “無弊守護者至今三百有餘年”, “內靑龍砂切近投唾坐立俱見之地”, “距先山不過數十步”로, 이는 산지 점유자가 산송 관련 문서에서 산지의 점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가장 빈번하게 내세우는 말이다. 『경국대전』에서는 품계에 따른 步數를 규정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에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산송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면서 산송에 대한 몇 차례의 受敎가 내려져 『속대전』에 송사의 절차, 심리의 원칙, 판결의 시행에 대한 조항으로 실리게 된다.
이 문서는 연명으로 올리는 상서로, 상서의 내용은 山訟과 孝行․卓行의 旌閭를 위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문서의 형식은 먼저 상서한 자의 거주지, 신분직역, 성명을 쓰고, 행을 바꾸어 상서 내용을 쓴다. 마지막에는 상서에 참여한 연명자의 신분직역과 이름을 써서 관에 제출한다. 상서를 접수한 관에서는 판결문인 제음을 내리는데 제음은 상서의 내용보다 짙고 크게 써서 상서 내용과 구분하였다. 문서의 좌상단 윗부분에는 “官”字를 揮筆하고 그 아래에 서압을 하며, 제음의 내용은 문서 좌하단에 쓰고 제음의 군데군데 적색의 官印을 찍는다. 제음의 내용이 길어지면 보통은 뒷면에 이어서 쓴다.
자료적 가치
조선 후기 전형적인 산송 관련 상서로, 조선 후기 산송에서 점유권을 인정받기 위해 내세우는 근거, 청송 기관 및 제음의 변화, 상서의 문서 형식 등을 알 수 있다.
이 문서는 김창섭을 대표자로 해서 작성된 것 중 세 번째에 해당된다. 각각의 문서는 참여했던 인원이 변화가 있는데, 첫 번째는 김창섭을 포함해서 40인, 두 번째는 김창섭외 23인, 세 번째는 김창섭외 40인으로 구성되었다. 김창섭이 김대현(호 유연당)에서 김봉조(호 학호)로 이어지는 오미동의 종손의 위치였기에 나머지 여섯 개의 파에서 고르게 참여했을 것이라고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참여한 구성원을 살펴보면, 김경조(호 심곡)의 후손이 가장 많이 참여했다. 이것은 아마도 김창섭이 심곡파에서 입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韓國法制史攷』, 朴秉濠, 法文社, 1983
『朝鮮後期 山訟 硏究』, 全炅穆, 전북대박사학위논문, 1996
김경숙, 『규장각』 25,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02
서성훈, 『안동문화연구』, 안동문화연구회, 2008
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