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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 품목(稟目)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XC.1856.4725-20160630.Y16502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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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첩관통보류-품목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품목
작성주체 옥동서원, 성주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작성시기 1856
형태사항 크기: 99 X 60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옥동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관련자료

안내정보

1856년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 품목(稟目)
1856년 3월 초8일에 옥동서원 원장 황대로와 재임 및 유생 등 21명은 옥동서원의 속점인 오도점의 상한[상놈] 성악이이완복이 멋대로 상주 서산서원의 소속이 되어서 질그릇을 납품하지 않고, 오히려 향사를 위해 모인 사림들을 꾸짖고 욕한 사실을 보고하고 그들에 대한 처벌과 속점을 다시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품목이다. 품목에서는 푸른 것이 흰 것으로 도치되어 색이 변하는 것은 가히 놀랍고도 놀라운 일인데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것은 지금에 이르러 옥동의 오도점의 상놈 성악이와 이완복이 서원에서 재계하며 몸과 마음을 닦고 있던 선비들을 꾸지고 욕하는 일이 발생하여 대향을 거르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옥동서원은 익성공 방촌 황희를 제향하는 곳으로 향례때에 사용하는 질그릇이 많이 필요하기에 1803년(순조 3)부터 서원에서 가까운 땅에 오도점을 설립하여 질그릇을 거두어 사용한 것이 54년이 되었다고 한다. 옥동서원 측은 요사이 속점의 백성들이 서산서원의 역에 응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사림의 장소는 같은 것이기에 이것의 경계를 한정하여 역을 진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그렇기에 속점의 백성을 불러서 이르기를 전례에 의거하여 질그릇을 수납하라고 시키니 성악이와 완복이가 함께 서산서원으로 역을 옮겼다고 일컬으면서 납부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마음이 정녕 편하지 않아서 바로 잡으려고 하였는데, 그들이 앞장서 나가는 행동거지가 재빠르고 갑자기 부르짖으며 방의 모퉁이에서 험악한 말과 욕설을 하는 것이 극에 달하였다고 하였다. 이들 외에도 그들의 요사하고 간악한 부인이 많은 선비들을 능욕하는 지경에 이르러 같은 자리에 있던 자들이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였다고 알렸다. 그러면서 어이가 없고 천치가 된 듯했는데, 이런 일이 바로 상주목의 도색소에서 제물을 가져와서 서원 내에 들여올 때에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옥동서원 측은 품목에서 한탄하면서 세상에 어찌 이 같은 변괴가 있겠는가라고 하며 통탄할 일이라고 적고 있다. 나아가 이것, 즉 선비들에게 소리치고 욕을 하는 행위를 엄징하지 않는다면 사액 서원의 중요함이 없어지고 장차 서원이라 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많은 선비들이 모였으나 장차 선비라고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들도 또한 같은 사람으로서 어찌 옥동서원에 꺼리는 것 없이 푸대접하고 꼬깝게 여기는 것을 참겠는가라고 분노를 표출하였다. 한편으로는 주자의 사례를 들어 상주목사가 황희를 제향하는 옥동서원에 더욱 신경 써주길 당부하였다. 옥동서원 측은 동일한 관점에서 아울러 살펴서 해당 속점으로 하여금 전례를 ㅤㅉㅗㅈ아 따라서 옥동서원의 역을 거행하고, 성악이와 완복은 감영에 보고하여 법률에 의거하여 유배의 법으로 엄하게 처벌하는 것이 기강을 붙들어 일으키는 방안이라고 하였다. 당시 서산서원은 노론의 영수였으며, 당대 최고의 세도가인 안동권씨 가문의 선조가 되는 문충공 김상용청음 김상헌 형제를 제향 하던 곳이었다. 그렇기에 오도점이 서산서원 소속으로 된 것에 대하여 강하게 비난하지 못하고 수령의 선처를 요구하였다. 나아가 자신들을 모욕한 성악이와 이완복에 대하여 감영에 보고하여 유배형을 내리도록 요청하였는데, 상주목사는 오도점의 소속 문제는 속점의 백성들이 정하는 것이며, 옥동서원 유생들을 모욕했다는 죄는 당사자를 잡아들여 처리하겠다고 판결하였다. 하지만 감영으로의 송치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56년 3월 초8일에 玉洞書院 院長 黃岱老와 齋任 및 儒生 등 21명은 옥동서원의 屬店인 吾道店의 常漢 成岳伊李完卜이 멋대로 尙州 西山書院의 소속이 되어서 陶器를 납품하지 않고, 오히려 享祀를 위해 모인 士林들을 詬辱한 사실을 보고하고 그들에 대한 처벌과 속점의 還屬을 요구하는 稟目
1856년 3월 초8일에 玉洞書院 院長 黃岱老와 齋任 및 儒生 등 21명은 옥동서원의 屬店인 吾道店의 常漢 成岳伊李完卜이 멋대로 尙州 西山書院의 소속이 되어서 陶器를 납품하지 않고, 오히려 享祀를 위해 모인 士林들을 詬辱한 사실을 보고하고 그들에 대한 처벌과 속점의 還屬을 요구하는 稟目이다. 품목에서는 푸른 것이 흰 것으로 倒置되어 색이 변하는 것은 가히 놀랍고도 놀라운 일인데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것은 지금에 이르러 玉洞吾道店의 상놈 성악이이완복이 서원에서 齋戒하며 肅淸하는 士林에게 詬辱하는 일이 발생하여 大享을 거르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옥동서원은 翼成公 厖村 黃喜를 제향하는 곳으로 享禮때에 사용하는 陶器가 許多하기에 1803년(순조 3)부터 서원에서 가까운 땅에 吾道店을 設立하여 陶器를 收用한 것이 54년이 되었다고 한다. 옥동서원 측은 요사이 店漢들이 西山書院의 역에 응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사림의 장소는 같은 것이기에 이것의 경계를 한정하여 역을 진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그렇기에 店漢을 불러서 이르기를 前例에 의거하여 질그릇을 수납하라고 시키니, 성악이와 완복이가 함께 서산서원으로 역을 옮겼다고 일컬으면서 납부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마음이 정녕 편하지 않아서 바로 잡으려고 하였는데, 그들이 앞장서 나가는 행동거지가 재빠르고 갑자기 부르짖으며 방의 모퉁이에서 狂言悖說이 극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들 외에도 끝내는 그들의 요사하고 간악한 부인이 많은 선비들을 凌辱하는 지경에 이르러 같은 자리에 있던 자들이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였다고 알렸다. 그러면서 어이가 없고 천치가 된 듯했는데, 이런 일이 바로 都色所에서 제물을 奉入하던 때에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옥동서원 측은 품목에서 한탄하면서 세상에 어찌 이 같은 變怪가 있겠는가라고 하며 통탄할 일이라고 적고 있다. 나아가 이것, 즉 선비들에게 소리치고 욕을 하는 행위를 嚴懲하지 않는다면 사액 서원의 중요함이 없어지고 장차 서원이라 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많은 선비들이 모였으나 장차 선비라고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간절히 엎드려 염원하건데 厖村선생의 제향하는 太廟의 賜祭文 가운데에는 伊尹周公에 이르러 아름답고 높은 공로가 사람들에게 두루 미침을 칭찬하였고, 현재까지 400여 년 동안 愚民들이 임금의 실적을 칭송하였음을 모범으로 삼았다고 했다. 즉 황희를 이윤과 주공에 비유하여 그의 재상으로서의 업적을 칭송하고, 그로 인해 현재까지 임금을 칭송했음을 비유하고 있다. 그만큼 황희를 제향하는 옥동서원은 존중받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한[상놈]들에게 그러한 옥동서원 내에서 욕설을 듣게 되었으니 자신들도 또한 같은 사람으로서 어찌 옥동서원에 꺼리는 것 없이 푸대접하고 고깝게 여기는 것을 참겠는가라고 분노를 표출하였다. 한편으로는 옛날 朱子南康郡을 다스릴 때 西澗 劉渙劉恕 父子의 묘를 수리하고 白鹿洞에 이르러 더욱 保護하는 뜻을 더한 것이 어찌 합하의 오늘에 마땅히 효과가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상주목사가 황희를 제향하는 옥동서원에 더욱 신경 써주시길 당부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은 오도점이 감히 옥동서원에 역을 서야하고, 서산서원에 역을 서지 말라는 것도 아니며 또한 감히 서산서원에 역을 서고 옥동서원에 역을 서지 말라는 말도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점한들의 소속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소속과는 별개로 사림이 선현을 존숭하는데 누구라도 점한들을 부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나아가 옥동서원 측은 동일한 관점으로 아울러 살펴서 해당 店으로 하여금 前例를 ㅤㅉㅗㅈ아 따라서 옥동서원의 역을 거행하고, 성악이와 완복은 營門에 보고하여 律에 의거하여 유배의 법으로 엄하게 처벌하는 것이 기강을 붙들어 일으키는 방안이라고 하였다. 이는 오도점의 소속이 서산서원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전의 사례를 따라서 54년간 옥동서원의 속점 이었으니 그 소속을 환원시켜주고, 자신들에게 무뢰하게 행동한 성악이와 완복은 감영에 보고하여 엄하게 처벌함으로써 실추된 옥동서원과 사족들의 위상을 되돌리고, 사회적 기강을 바로잡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위의 품목에서 확인되는 문제점은 첫째 오도점은 옥동서원에서 필요한 질그릇을 공급받기 위해 1803년 옥동에 만든 곳이며, 그 이후 54년간 질그릇을 공급해 오다가 갑자기 서산서원으로 소속을 옮겼다는 것이다. 둘째는 하층민인 店漢이 서원 내에서 다른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향을 준비하기 위해 재계하고 있던 유생들에게 소리치고 욕을 함으로써 사족과 서원의 위상을 실추시켰고, 결국 질그릇 공급과 막말로 인한 혼란으로 大享을 못 지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당시 옥동서원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오도점이 현재의 상주시 연원동에 위치한 서산서원 소속으로 상의하지 않고 바꾼 것은 옥동서원은 비록 사액 서원이었지만, 서산서원은 老論의 領袖이자, 安東權氏 世道 正權의 先祖가 되는 文忠公 金尙容淸陰 金尙憲 형제를 제향 하는 곳으로써 옥동서원과는 당대의 위상이나, 지방관의 관심사에서 크게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옥동서원 측도 서산서원에 직접적으로 속점의 환원을 요구하지 못하고 관청에 호소하였던 것이다. 또한 19세기 이래로 신분제의 문란과 사회·경제적 문제의 심화로 기존의 양반지배체제가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양반들의 사회적 권위 내지 지위가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렇기에 상놈이라 괄시받던 점한들이 서원 내에서 유생들에게 소리치고 욕설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비단 옥동서원만의 문제가 아닌 당시 사회적으로 양반들의 위상이 그만큼 실추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옥동서원 측은 자신들이 당한 일은 관아의 都色所에서 제물을 봉입할 때 있었던 일이기라고 밝혔다. 즉 자신들의 말이 사실임을 도색이 증명해 줄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나 상주목사는 옥동서원 측의 품목을 받고 이튿날인 9일의 題音에서 各店이 各院에 응하여 역을 지는 것은 그 점에 속한 민들이 소망하여 붙는 것이기에 수령이 결정할 바는 아니며, 兩漢의 언사가 많은 선비들을 업신여겨 매우 통탄하게 한 것은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죄인을 붙잡아 와서 엄히 다스릴 일이라고 하였다. 상주목사은 두 서원의 위상을 고려하여 서산서원에 직접적 관련이 있는 부분은 사유를 들어 넘어가고, 綱常과 관련된 부분은 옥동서원의 위상을 고려하여 처벌하겠다고 했지만 옥동서원 유생들이 요구한 감영으로의 送致는 결정하지 않았다.
자료적 가치
이 자료는 19세기 중반 영남지역 향촌사회의 실상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는 영남지역 남인계 서원에 대한 노론계 지방관의 미온적 태도와 서원의 권위에 따른 원속들의 移屬 및 향촌사회에서의 사족지배체제가 붕괴되어가는 모습이 확인된다. 한편으로는 노론계 유력 서원의 위세를 빌려 원속들의 횡포가 심화되어 갔던 상황으로도 볼 수 있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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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稟目
右稟爲伏以世▣▣▣▣▣▣▣▣南倒置蒼素變色可驚可愕之事無所不有而至於今日本洞吾道店成岳伊李完卜詬辱
士林於黌齋肅淸 大享隔日之變而極矣盖本院卽 翼成公厖村黃先生妥(靈)之所也 享禮時所用陶器不啻許多故往在癸亥
院設立吾道店於本院至近之地收用陶器者于五十四年矣近者似聞應役於 西山書院云而均是儒林之所則似無役此界限故招致店漢
使之依前例收納陶器則同成岳伊完卜兩漢稱以移役於 西山牢拒不納不寧惟是▣挺身擧措駿愕咆哮隨穾狂言悖說罔有紀極
畢竟使其妖惡之妻凌辱多士一座失色如呆如癡此是 祭物奉入之時而都色之所▣▣▣噫噫痛矣世豈有如許變怪哉此而不痛懲則莫
重 額院將無以爲院矣駿奔多士將無以爲士矣竊伏念 厖村先生配食
太廟而 賜祭文中至以伊尹周公稱美豊功偉烈浹人肥骨至今四百餘年愚夫愚婦咸誦君實則渠輩亦是人類何忍若是恝怨無忌於本
院哉昔朱夫子之治南康郡也修劉西澗父子墓至於白鹿洞則尤所加意保護此豈非 閤下今日之所當效法者乎 生等以吾道店非敢曰
立役於玉洞而不立役於西(山)也亦非敢曰立役於西山而不立役於玉洞也伏願 一視幷觀使該店依例隨行本院之役成岳伊完卜段報使
營門依律嚴處施以竄配之典使之扶綱振紀之地無任恐懼謹稟
丙辰三月初八日玉洞書院院長黃垈老
齋任盧鳳賢
黃養善
儒生黃集善
趙雲岐
黃大鉉
盧秉一
金瑞河
全叙九
黃延老
黃摯鉉
盧性愚
姜逌永
黃致老
呂漢龍
洪宇駿
金熙鏞
李秉淵
黃圭老
康永疇
宋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