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6년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 품목(稟目)
1856년 3월 초8일에 옥동서원 원장 황대로와 재임 및 유생 등 21명은 옥동서원의 속점인 오도점의 상한[상놈] 성악이와 이완복이 멋대로 상주 서산서원의 소속이 되어서 질그릇을 납품하지 않고, 오히려 향사를 위해 모인 사림들을 꾸짖고 욕한 사실을 보고하고 그들에 대한 처벌과 속점을 다시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품목이다.
품목에서는 푸른 것이 흰 것으로 도치되어 색이 변하는 것은 가히 놀랍고도 놀라운 일인데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것은 지금에 이르러 옥동의 오도점의 상놈 성악이와 이완복이 서원에서 재계하며 몸과 마음을 닦고 있던 선비들을 꾸지고 욕하는 일이 발생하여 대향을 거르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옥동서원은 익성공 방촌 황희를 제향하는 곳으로 향례때에 사용하는 질그릇이 많이 필요하기에 1803년(순조 3)부터 서원에서 가까운 땅에 오도점을 설립하여 질그릇을 거두어 사용한 것이 54년이 되었다고 한다. 옥동서원 측은 요사이 속점의 백성들이 서산서원의 역에 응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사림의 장소는 같은 것이기에 이것의 경계를 한정하여 역을 진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그렇기에 속점의 백성을 불러서 이르기를 전례에 의거하여 질그릇을 수납하라고 시키니 성악이와 완복이가 함께 서산서원으로 역을 옮겼다고 일컬으면서 납부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마음이 정녕 편하지 않아서 바로 잡으려고 하였는데, 그들이 앞장서 나가는 행동거지가 재빠르고 갑자기 부르짖으며 방의 모퉁이에서 험악한 말과 욕설을 하는 것이 극에 달하였다고 하였다. 이들 외에도 그들의 요사하고 간악한 부인이 많은 선비들을 능욕하는 지경에 이르러 같은 자리에 있던 자들이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였다고 알렸다. 그러면서 어이가 없고 천치가 된 듯했는데, 이런 일이 바로 상주목의 도색소에서 제물을 가져와서 서원 내에 들여올 때에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옥동서원 측은 품목에서 한탄하면서 세상에 어찌 이 같은 변괴가 있겠는가라고 하며 통탄할 일이라고 적고 있다. 나아가 이것, 즉 선비들에게 소리치고 욕을 하는 행위를 엄징하지 않는다면 사액 서원의 중요함이 없어지고 장차 서원이라 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많은 선비들이 모였으나 장차 선비라고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들도 또한 같은 사람으로서 어찌 옥동서원에 꺼리는 것 없이 푸대접하고 꼬깝게 여기는 것을 참겠는가라고 분노를 표출하였다. 한편으로는 주자의 사례를 들어 상주목사가 황희를 제향하는 옥동서원에 더욱 신경 써주길 당부하였다. 옥동서원 측은 동일한 관점에서 아울러 살펴서 해당 속점으로 하여금 전례를 ㅤㅉㅗㅈ아 따라서 옥동서원의 역을 거행하고, 성악이와 완복은 감영에 보고하여 법률에 의거하여 유배의 법으로 엄하게 처벌하는 것이 기강을 붙들어 일으키는 방안이라고 하였다. 당시 서산서원은 노론의 영수였으며, 당대 최고의 세도가인 안동권씨 가문의 선조가 되는 문충공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 형제를 제향 하던 곳이었다. 그렇기에 오도점이 서산서원 소속으로 된 것에 대하여 강하게 비난하지 못하고 수령의 선처를 요구하였다. 나아가 자신들을 모욕한 성악이와 이완복에 대하여 감영에 보고하여 유배형을 내리도록 요청하였는데, 상주목사는 오도점의 소속 문제는 속점의 백성들이 정하는 것이며, 옥동서원 유생들을 모욕했다는 죄는 당사자를 잡아들여 처리하겠다고 판결하였다. 하지만 감영으로의 송치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이해준, 경인문화사, 2008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