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州 玉山書院 儒生들이 屬寺인 定慧寺를 本營 寺案에서 빼고, 영구히 勿侵토록 完文을 成給해주길 兵馬節度使에게 요청한 上書
내용 및 특징
이 상서는 경주 옥산서원 사림 李鼎受, 權達渙 외 47명이 兵馬節度使에게 올린 것으로 屬寺인 定慧寺를 本營 寺案에서 빼고, 영구히 勿侵토록 完文을 내려달라는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옥산서원은 晦齋 李先生의 尸祝之所로서 이곳에서 수백 보 떨어진 곳에 정혜사가 있는데 선생이 讀書講學하던 곳이었다. 佛宇의 기둥과 벽 사이에 선생의 手墨이 있고, 사찰 밖의 巖臺는 모두 선생이 命名한 것이라고 하였다. 1597년(萬曆 丁酉) 相國 李元翼이 體察使로 서원에 왔을 때 아래 위의 계곡과 산,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도 선생의 향기가 끼치지 않음이 없으므로 정혜사를 옥산서원에 소속시켰다고 한다. 이후 營本府에서 一帶를 勿侵하라는 뜻으로 完文을 成給하였다. 무릇 당시에는 매번 도적처럼 때마다 밥을 먹으러 들어오고 빼앗아 취하는 일 등의 침해가 있어서 相國이 狀啓로 僧舍를 보호하려는 뜻을 자세히 적어서 그 정성으로 인해 특별히 그 뜻이 완문의 성급으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그로인해 이후부터 구역의 谿壑에 유적이 한결 같이 완연하였으며, 선생문집판본을 거듭 절에 보관하고 승도들로 하여금 이를 典守하도록 한 것이 수백 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지난 1780년(庚申) 사이에 갑자기 兵營의 侵役을 입고는 寺僧을 보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옥산서원에서 분주하게 備局에 呈訴하여 별도의 關文을 본영에 보내어 특별히 전후의 題音을 嚴하게 하여, 본원에 환속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매번 新舊의 兵使 교체시에 兵營 僧廳에서 침탈하는 까닭에 僧徒가 散亡하여 丘墟하게 된 것이 수십여 년이 되었었다. 遺墨에 먼지가 쌓이고 문집판각에 잡초가 우거져 大小의 신하들이 와서 살피고, 원근의 章甫가 다녀가면서 서로 탄식하고 대부분의 옥산서원 사림도 함께 탄식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몇 년 전에 옥산서원에서 通文을 내어 인근 士友들에게 財力을 鳩聚하고 또 본원으로부터 허다한 齋糧을 제출받아 수 칸의 屋子를 取得하여 遺蹟과 板閣을 保守할 계획을 謀議하였다. 이후에 사찰을 중건하고 승려들을 모았는데 재차 그들에 대한 침역이 발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상서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생각건대 兵營에서는 士林이 사사로이 건립한 실상을 알지 못하고, 정혜사가 重修된 것이라 생각하여 거듭 다시 侵役을 한 즉 그것은 사림이 서원을 위하여 힘을 쓴 뜻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옥산서원 유생들이 이것을 염려하여 이에 감히 멀리서 와서 글을 올리니 兵使께서는 깊이 생각하여 당초 李相國이 절을 서원에 소속한 그 뜻이 어떠하며, 오늘날 사림이 재물을 내어 營建한 그 정성이 또한 어떠한 것인지 깊이 생각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어서 옛날의 정혜사는 이미 화재로 재가 되었고, 오직 이 새로이 지은 僧舍는 특별히 본원에서 사사로이 건립한 하나의 齋舍일 뿐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침역 문제가 거듭 발생하는 원인에 대하여 옥산서원 유생들은 營案에 정혜사가 등록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았다. 실제, 유생들은 營門에서는 어찌 다시 정혜사 터가 尙在한다고 꿋꿋히 그러는가라고 반문하며, 생각건대 합하께서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은 알지만 절의 이름이 營案에 있기에 다른 날 즉 遞任日에 僧廳의 奸計로서 前日과 같은 일이 다시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전의 兵營의 兵使들이 완문을 성급했던 것을 공손히 따르고, 체임 후에 나타날 폐단의 걱정을 피하는 방법으로는 兵營廳 寺案에서 정혜사의 이름을 刊去하고, 거듭 완문을 내어 영구히 勿侵하는 지역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상서를 보면 정혜사는 옥산서원 속사임에도 불구하고 사안에 등재되어 있어서 17세기 이후 지방관이 교체될 때마다 끊임없이 침역을 받고 있었으며, 그때마다 서원 유생들의 呈訴로 환속시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정혜사의 화재를 계기로 서원 측에서도 승도들의 도산을 막고 피폐해진 유적과 판각을 보수하기 위해 옥산서원 사림들이 재물을 구취하여 여러 칸의 屋子를 중수하였다. 이때 중수한 것은 이전과 달리 사림들이 출자하여 건립된 것이기에 서원 측에서는 서원의 부속 건물인 齋舍로 주장했지만, 병영에서는 화재로 소실된 정혜사가 중건된 것으로 판단하여 승려들에 대한 침탈이 계속되었다. 서원 유생들은 이런 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정혜사가 병영청 사안에 등재되어 있기 때문이라 판단하고, 1785년(을사) 2월 10일에 이르러 정혜사를 이 사안에서 영구히 刊去하기 위해 상서하였던 것이다.
題音을 보면 22일에 병마절도사가 勿侵과 寺案 삭적에 대한 完文 成給을 결정한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옥산서원에 남아있는 완문 중에는 같은 날 兵馬節度使 명의로 승청과 정혜사 앞으로 발급된 완문이 남아 있어서 참고가 된다. 하지만 사림들의 요청으로 당시 완문이 成給되었지만 이후에도 계속해서 침역을 당하였음은 서원에 남아있는 여타의 완문 등을 통해 확인된다. 정혜사는 1834년 화재이후 중건되지 못하였는데, 여기에는 옥산서원 부채의 증가와 정혜사의 속사로서의 기능 상실 등이 크게 작용하였다. 『攷往錄』을 보면 19세기 초에 부채가 누적되어 이를 갚기 위해 田畓을 放賣하는 경우도 있었고, 1832년에는 서원에서 사용할 종이 공급을 위해 紙所를 별도로 설립 하였다. 원래 서원 사용의 종이는 정혜사가 담당하였는데, 이때에 와서는 승려의 도산, 관의 침탈 등으로 그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여 지소를 설치한 것이다. 또한 지소의 운영경비는 本所錢, 定慧寺貿紙錢 및 僧退俗禮錢 등으로 沓 23두락을 買得하여 충당하였다. 이처럼 서원 측에서도 관의 침탈이 계속되고 승려들의 도산이 연이어 나타나자 더 이상 정혜사의 존속에 관여하지 않고 지소의 설치와 같이 다른 방안을 강구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본 상서가 작성되던 시기만 하더라도 옥산서원 사림들은 속사인 정혜사의 잔폐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중수에 나섰었다. 『本寺重修後餘錢置簿』에 의하면 서원 사림들은 寺樓에서 齋會하여 諸山知名大師의 도움으로 잔폐해진 사원을 중수하였으며, 1780년 4월에는 사원의 폐허를 막기 위해 자체적으로 규약을 세우고 있다. 이 立規에 참가한 자는 전현직 僧統·首僧·登階 ·直舍 등 모두 해당 시기 정혜사를 포함한 경주지역 승려 사회에서 지도급 승려들이었다. 이처럼 승려들과 사림이 鳩財하여 사찰을 중건한 것은 매우 특수한 사례였다. 이것은 그만큼 정혜사의 존속이 옥산서원 운영에 매우 중요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서원의 대표적 경제적 기반은 토지와 노비이며, 이외에도 院屬과 屬寺, 屬店과 같은 것이 더 있었다. 특히 속사와 속점에 소속된 승려와 장인들은 서원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고 경우에 따라 노동력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이후 서원경영이 어려워지면서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 자료는 그러한 노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특히 정혜사에는 회재의 문집판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목판을 보관하고 있었으며 그것의 인출과 보수에 소속 승려들이 참여하였다. 그렇기에 서원 입장에서는 정혜사가 가지는 경제적 이점뿐만 아니라 서원의 중요한 유물을 보전·관리한다는 점에서 사원과 승려들이 필요하였다.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1차 작성자 : 이병훈, 2차 작성자 : 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