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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 남여흠(南汝欽) 유기아수양입안(遺棄兒收養立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8+KSM-XD.1700.4777-20160630.071423100042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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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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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증빙류-입안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입안
작성주체 남여흠, 영해도호부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작성시기 1700
형태사항 크기: 35.5 X 72.0
장정: 점련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덕 괴시 영양남씨 괴시파 영감댁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관련자료

1699~1732년 영양남씨(英陽南氏) 유기아(遺棄兒) 수양입안(收養立案) 문서
일련 문서는 영해부(寧海府)에 사는 영양남씨가 유기아(遺棄兒)를 수양(收養)하여 노비로 삼기 위해 입안(立案)을 발급받으면서 작성한 것이다. 총 4건의 문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3건은 1699년에 남여흠(南汝欽)이 벌인 것이고, 1건은 1732년(영조 8)에 남기형(南紀衡)이 벌인 것이다. 문서에는 당시 유기아를 발견하여 관아에 신고하여 아이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게 되는 절차가 기술되어 있다.
남여흠(南汝欽)의 문서는 3건이 점련되어 있다. ①-(1)1699년에 남여흠(南汝欽)이 영해부 관아에 입안을 발급해 줄 것을 요청하는 소지(所志), ①-(2)괴시리(槐市里) 색장(色掌) 및 절린(切隣)의 진술서, ①-(3) 1700년에 영해부 관아에서 발급해준 입안(立案)이다. 남기형(南紀衡)의 문서는 ②-(1)1732년에 남기형(南紀衡)이 영해부 관아에 입안을 요청하는 문서만 남아 있고, 관련 인물의 진술서나 입안은 남아 있지 않다.
유기아를 수양하는 법은 조선전기에 대체적으로 그 틀이 형성되었다. 본격적으로 법이 다듬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1695년(숙종 21) 「을해유기수양아법」을 만든 때였다. 유기아는 거두어 주는 사람이 양자, 노비, 고공(雇工) 등으로 만들 수 있다. 이 법규는 1697년(숙종 23)에 확정되었다. 이후 1732년(영조 8) 「임자진휼사목」을 거쳐, 1746년(영조 22)에는 『속대전』에 공식적인 대전체계로 편입될 수 있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속대전』의 기본적인 조항을 준수하되 수양 규정이 좀 더 구체화된 『자휼전칙(字恤典則)』이 1783년(정조 7)에 제정되었다.
행걸아에 관한 규정은 정조대 『자휼전칙』에 포함되었다. 『자휼전칙』에는 흉년의 행걸아는 10세로 미만으로, 유기아는 3세 미만으로 수양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었다. 수양 주체는 대개 양반과 양인층이었다. 한편 피수양자를 노비와 고공으로 삼을 수 있는 나이도 각 법령에서는 조금씩 변동이 있었다. 숙종대 「을해유기수양아법」에서는 16세 미만은 노비로, 16세 이상은 고공으로 삼을 수 있었고, 영조대 「임자진휼사목」에서는 13세를 기준으로 미만은 노비로, 그 이상은 고공으로 삼게 했다. 즉 남여흠(南汝欽)의 유기아 수양은 숙종대의 「을해유기수양아법」에 근거하여 진행된 것이고, 남기형(南紀衡)의 유기아 수양은 영조대 「임자진휼사목」에 근거하여 진행된 것이다.
먼저 남여흠(南汝欽)의 문서를 보면, 1697년(숙종 23) 5월에 남여흠의 비(婢)인 철녀(哲女)가 태어난 지 5~6개월 정도 된 아이를 상전댁에 데려왔고, 상전댁에서는 이 아이를 구호하여 생명을 살려냈고, 이름을 구녀(九女)라고 지었다. 2년이 지난 후 철녀는 상전댁의 지시로 영해부 관아에 유기아 수양입안(遺棄兒收養立案)을 요청하는 소지를 제출했다. 초사에서 사실이 입증되자 1700년(숙종 26) 영해부 관아에서는 유기아 수양입안을 발급했다. 입안에는 아이의 옷에 관인을 찍어준다는 내용이 기술되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성장한 이후 자식이나 노비가 될 때 빙고(憑考)하기 위한 것이다.
1732년(영조 8) 4월에는 영해부의 남기형(南紀衡)이 유기아를 발견, 수양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남기형은 먼저 올해 1월 20일에 유리걸식하고 있는 여자 예단(禮段)과 그가 데려온 딸인 귀단(貴段, 9세)와 막덕(莫德, 7세)를 집안에 들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막선(莫先)이란 사람이 간절히 애원하여, 그의 딸 최절(崔節, 9세)을 작년 8월부터 지금까지 집안에서 기르고 있으며 그 동안 천연두를 두 번이나 앓았지만 이를 살려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수령은 "입안(立案)을 하기 위해 가까운 이웃[切隣] 등을 데려 올 것"이라는 처결을 내려 입안 발급을 위한 절차가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입안이 최종적으로 발급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문서

번호

자료명

발급

수취

①-1

1699년 남여흠(南汝欽) 비(婢) 철녀(哲女) 유기아수양입안(遺棄兒收養立案)

요청 소지(所志)

남여흠

영해부

①-2

1699년 괴시리(槐市里) 색장(色掌) 및 절린(切隣) 초사(招辭)

영해부

내부문서

①-3

1700년 남녀흠(南汝欽) 유기아수양입안(遺棄兒收養立案)

영해부 

남여흠

②-1

1732년 남기형(南紀衡) 유기아수양입안(遺棄兒收養立案)

요청 소지(所志)

남기형

영해부


※ 참고문헌
金武鎭, 1993, 「조선사회의 遺棄兒 收養에 관하여」, 『啓明史學』 4, 啓明史學會.
변주승, 1998, 「조선후기 遺棄兒, 行乞兒 대책과 그 효과 -給糧策을 중심으로-」, 『韓國史學報』 3, 4, 高麗史學會.
1차 작성자 : 김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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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정보

1700년 남여흠(南汝欽) 유기아수양입안(遺棄兒收養立案)
1700년(숙종 26) 5월에 남여흠(南汝欽)영해부(寧海府) 관아로부터 발급받은 유기아수영입안(遺棄兒收養立案)이다. 남여흠(南汝欽)은 소유한 비(婢)인 철녀(哲女)가 길에서 데려온 아이를 길렀다고 입안을 요청하였고, 관아에서는 마을의 색장(色掌)과 이웃 주민, 그리고 아이릐 진술을 받아 사실을 확인한 후 입안을 발급해주고 있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상세정보

1700년(숙종 26) 5월에 南汝欽寧海府 관아로부터 발급받은 遺棄兒收養立案
1700년(숙종 26) 5월에 南汝欽寧海府 관아로부터 발급받은 遺棄兒收養立案이다. 발급일자는 강희 39년(1700년)이라고 적혀 있으나, 연호 연대를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입안을 요청하는 소지나 진술서 모두 1699년 5월에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1697년(숙종 23)에는 흉년에 遺棄兒를 데려다 기르면 관아에서 입안을 받아 자신의 자식이나 노비로 삼을 수 있도록 하라는 국왕의 명령이 있었다. 1699년(숙종 25) 5월에 哲女가 그 해에 길가에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가 상전인 南汝欽이 수양토록 했으니 입안을 발급해 달라는 所志를 올렸다.
이에 대해 寧海府 관아는 切隣 및 色掌, 그리고 해당 아이에게 진술을 박고 사실여부를 확인한 후 입안을 발급하고 있다. 또한 동시에 아이의 옷에 관인을 찍어 준다고 하고 있다. 옷에 도장을 찍어주는 이유는 입안은 아이를 데려다 키운 당시에 받아야 하지만, 수양한 아이가 정식으로 데려다 키운 자의 노비나 자식이 되는 것은 성인이 된 이후이기 때문에 추후에 憑考하기 위한 것이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00년 남여흠(南汝欽) 유기아수양입안(遺棄兒收養立案)

康熙三十九年五月日。寧海府立案。
右立案爲成給事。粘連告狀及各人等
招辭是置。切隣色掌及同棄兒推問。則
路中得養。作名九女。的實是乎等以。衣服踏印
以給爲旀。立案成給爲遣。合行立案者。

行使[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