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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영해(寧海) 유학(幼學) 남유집(南有鏶) 등 산송관련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8+KSM-XB.1904.4777-20160630.07142310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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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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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남유집, 남조은, 남창조, 영양군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작성시기 1904
형태사항 크기: 97.0 X 54.0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덕 괴시 영양남씨 괴시파 영감댁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관련자료

1904년 영양남씨(英陽南氏) 영양군(英陽郡) 칠성봉(七星峰) 산송문서
일련문서는 영양남씨(英陽南氏)가 1904년 10월에 문중 사람들이 영양군(英陽郡) 북초면(北初面) 와구동(瓦邱洞)의 칠성봉(七星峰)에 있는 문중 선산을 두고 벌인 산송 사건을 담고 있다. ①1904년 영해(寧海), 영양(英陽), 안동(安東)에 사는 영양남씨 문중 사람 97명이 연명하여 영양군 관아에 올린 上書, ②영양군 관아에서 와구동에 내린 전령(傳令), ③ 다시 영양남씨 문중 사람들이 올린 上書, ④ 와구동(瓦邱洞) 존위(尊位)가 영양군 관아에 올린 첩정(牒呈)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의 문서에서는 산송의 한 유형으로 허장(虛葬)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보여준다. 허장이란 남의 땅에 몰래 무덤을 쓰기 위하여 땅 임자의 눈치를 떠보기 위해 가짜 무덤을 만드는 행위를 말한다.
문제가 되는 선산이 있는 칠성봉(七星峰)은 현재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칠성리에 있으며, 이곳에는 통정공(通政公)과 찰방공(察訪公)의 무덤이 소재하고 있었다. ①번과 ②번 문서는 아직 투장한 무덤이 虛葬이라는 것을 밝혀지기 전의 상황을 보여준다. 즉 이미 세 차례나 투장한 사건이 발생한 지점에 누군가 또 투장을 하여 무덤주인을 찾아내서 파내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이를 산 아래 마을 사람에게 지시하고 있다. ③번 문서에는 비로소 투장한 무덤이 虛葬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영양남씨 문중 사람들은 두민(頭民)을 독촉하여 무덤을 파보라고 했는데, 과연 허장이었고 사기 그릇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영양남씨 측에서는 유학 남조발(南朝潑) 등을 대표로 하여 앞으로 생길 수 있는 폐단을 막기 위한 처결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영양군 수령은 "이미 허장인데, 무슨 염려가 더 있겠는가. 걱정하지 말고 물러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④번 문서는 와구동에서 무덤을 파낸 결과를 마을의 존위(尊位) 등이 영양군 수령에 첩정으로 보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선산을 관리하는 문중은 투장자를 대상으로 산송을 진행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본 사례에서는 투장자가 밝혀지지 않았고, 허장이라는 소문이 돌아 정소를 제기한 영양남씨와 와구동 측에서 무덤을 조사한 결과 소문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무덤을 철거하는 과정에서도 영양군 관아에서는 고을 책임자에게 전령을 보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철거 책임을 해당 마을의 존위와 두민에게 지운 것이다.

문서

번호

자료명

발급

수취

1904년 영해(寧海) 유학(幼學) 남유집(南有鏶) 등

산송관련 상서(上書)

남유집 등

영양남씨

영양군

1904년 영양군(英陽郡) 와구동(瓦邱洞) 전령(傳令)

영양군

와구동 

존위 등

1904년 영해(寧海) 유학(幼學) 남조발(南朝潑) 등

산송관련 상서(上書)

남조발 등

영양남씨

영양군

1904년 영양군(英陽郡) 와구동(瓦邱洞) 존위(尊位)

산송관련 첩정(牒呈)

와구동 

존위 등

영양군

1차 작성자 : 김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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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정보

1904년 영해(寧海) 유학(幼學) 남유집(南有鏶) 등 산송관련 상서(上書)
1904년(광무 8) 10월에 남유집(南有鏶) 등 영양남씨 문중 사람 97명이 연명하여 영양군(英陽郡) 관아에 올린 산송관련 상서(上書)이다. 영양군 북초면(北初面) 와구동(瓦邱洞) 칠성봉(七星峰)에 있는 선산에 누군가가 투장(偸葬)했는데, 무덤주인을 찾을 수 없으니 무덤을 파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상세정보

1904년(광무 8) 10월에 南有鏶 등 영양남씨 문중 사람 97명이 연명하여 英陽郡 관아에 올린 산송관련 上書
1904년(광무 8) 10월에 南有鏶, 南朝溵, 南昶朝寧海, 英陽, 安東에 사는 영양남씨 문중 사람 97명이 연명하여 英陽郡 관아에 올린 산송관련 上書이다. 분쟁의 대상이 되는 곳은 北初面 瓦邱洞 七星峰에 있는 남씨 문중의 선산으로, 이곳에는 通政公과 察訪公의 산소가 있다. 상서에서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七星峰의 선산의 전체 山局은 영양남씨 문중에서 3백년이 넘도록 禁護해 왔다. 그런데 올해 가을에 누군가 單腦를 압박하는 아주 가까운 지점에 새 무덤을 투장한 것이다. 투장한 지점은 지난 병술년 가을에 金氏, 임진년 여름에 林氏, 무술년 가을에 任氏가 무덤을 투장했다가 파낸 곳으로 매우 要害한 곳이다. 문중 사람들은 누가 그랬는지 찾아보았으나 무덤주인을 찾을 수 없었다. 즉시 呈訴하고 싶었으나 그때는 관아에 수령이 부재중이었으므로, 지금가지 참고 있다가 이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산송을 제기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투장한 지역의 지형은 이전에 세 번 투장한 무덤을 파냈을 당시에 그린 圖尺에 분명이 나타나 있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투장한 무덤을 즉시 파내라고 판결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英陽郡 군수는27일에 刑吏에게 지시하는 처결을 내렸는데, "무덤주인을 찾아내야 하므로 산 아래 마을에 傳令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04년 영해(寧海) 유학(幼學) 남유집(南有鏶) 등 산송관련 상서(上書)

寧海幼學南有鏶南朝溵南昶朝等。百拜仰達于
城主閤下。伏以。治瓦邱七星峰。卽民等先祖通政公曁察訪公衣屨之莊也。禁護全局。殆過三百年餘是加尼。不意今秋。卽見有新埋偸塚壓逼於單腦不步
之地。其視丙戌秋金塚。壬辰夏林塚。戊戌秋任塚。三次掘去之處。不啻十分要害是如。民等不勝驚愕。左右搜覓。莫知其塚主。卽欲奔訴。而時値空衙。含
忍至此。盖單腦要害之處。固不可暫寄人偸塚。而且前日之圖尺。在三掘之形地昭然。其在法理宜有所處矣。玆敢齊聲仰籲于公決之下爲去乎。伏乞。參
商敎是後。依法典卽掘之地。千萬血祝之至。
行下向敎事。
城主處分。
甲辰十月日。寧海。幼學南有鑰南有鉦南有鋈南有錕南朝㶅南朝涵南朝{氵+昇}南朝澔南朝演南朝愰南朝準南朝鏽南朝瀛
南朝泓南朝泰南朝潑南朝浹南朝滈南朝瀅南朝瀜南朝澈南朝洼南朝灝南朝涏南朝洵南朝洞南朝活
南朝鋈南孝穆南孝柱南孝穡南孝彬南孝櫶南敬穆南敬述南孝順南孝瑩南孝懋南孝柄南孝弼南孝烋
南孝棱南孝秩南孝植南孝秊南孝本南孝琇南孝棫南孝恂南孝相南孝哲南孝塤南孝樸南孝塾南孝業南孝岳
南孝楦南孝檍南孝樂南孝東南孝璨南孝琳南孝格南孝杓南孝昌南孝鶴南孝橚南鎭嶠南鎭㠏南鎭嵎
南鎭五南鎭圭南啓炳南國炳南炳圭南浩重英陽南朝楗南朝薰南朝暹南朝曇南朝昇南朝曄南朝旺南朝曦南朝永
南孝章南孝百南孝建盈德南極煥南儒煥南孝杰安東南朝澤南朝汜南朝渤等。

英陽官[印 : 英陽郡守之章]。

搜覓塚主次。傳令于
山下洞向事。
二十七日。
刑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