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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6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성균관(成均館)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7+KSM-XF.1826.1100-20150630.01952600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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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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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김, 조, 영남유림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826
형태사항 크기: 95 X 41.7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와룡 광산김씨 유일재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관련자료

1824~1826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통문(通文)
이 문서는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을 포장하는 것과 관련하여 작성된 통문으로, ①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성균관(成均館) 통문(通文), ②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도산서원(陶山書院) 통문(通文), ③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병산서원(屛山書院) 통문(通文), ④1826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성균관(成均館) 통문(通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동 와룡 광산김씨 유일재종택에 소장되어 온 자료이다.

김득연은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안동에 주둔한 명군의 군량미 보급에 힘쓴 인물로서 명군의 대장인 경리 양호의 부하 장수들과 교유하며 문장과 덕행으로 추앙받은 바 있는 인물이다.

김득연의 포상과 관련하여 광산김씨 유일재 문중을 비롯하여 영남의 유림들은 김득연 포장과 증직을 내려달라고 청원운동을 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로 명나라 자수가 지은 비문의 서문에 김득연의 덕행을 칭송한 사실이 있으며, 이러한 내용을 기재하여 성균관에 통문을 보낸 것이다. ①번 문서는 이에 대한 통문에 대해 회답하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성균관 장의와 유사는 김득연의 충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은전의 흠결이고 여론이 억울할만한 일이라고 하면서 안동의 유림들이 국왕에게 호소하여 포장 받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②번 문서는 도산서원에서 주계서원으로 보낸 통문인데 김득연의 행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문서에는 김득연이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켜 사기를 북돋았고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명나라의 병사를 대접하고 방어에 임하면서 지역을 보호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또한 명나라 장수로부터 칭송을 받은 것인 양호(揚鎬)가 김득연에게 시를 증여한 사실이 있음을 말하면서 그 시에 '유자 학정주(孺子 學程朱)'라는 문구를 통해 이는 명나라 장수에게서 허여 받은 것이므로 김득연의 언행에 중국인이 깊이 경복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앞으로는 창의하여 목숨을 바치는 충성이 있었으며 뒤로는 의리를 지켜 자정하는 절개가 있는 김득연을 중국인은 경복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숭장(崇獎)하는 바를 모르고 수백년이 흘렀음을 안타까워하면서 기한을 정하여 상소를 작성해 조정에 올려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달라는 요청을 하려고 한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이 통문은 62명이 연명하여 작성한 것이다.

③번 문서는 병산서원에서 작성한 것으로 도산서원에서 건의한 상소를 올리자는 견해에 동조한 글이다. 이 문서에는 김득연이 인조반정 당시의 행적이 기재되어 있다. 김득연은 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응하지 않았으며 같은 뜻을 가진 동지가 없음을 한탄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서술하였다. 당시 김득연과 마음을 나눈 동료는 문정공(文貞公)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이 있었는데, 계첩(稧帖)을 만든 바 있다고 하였고,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1674~1756)이 당시의 일을 서술하여 칭송한 바 있다고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김득연의 의절이 드러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상소를 올리자는 발의에 찬성하며 날짜를 정하여 상소를 올릴 때 참여하겠다고 하면서 113명이 연명하여 이 통문을 작성하였다.

④번 문서는 2년이 지난 1826년에 성균관에서 보내 온 답통이다. 이 통문에서도 성균관 장의와 유사는 김득연의 충절이 수백년 동안 드러나지 않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공의가 없을 수 없으니 반드시 국왕에게 호소하여 천양(闡揚) 받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문서

번호

자료명

발급

수취

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성균관(成均館) 통문(通文)

성균관

영남유림

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도산서원(陶山書院) 통문(通文)

도산서원

주계서원

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병산서원(屛山書院) 통문(通文)

병산서원

 

1826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성균관(成均館) 통문(通文)

성균관

영남유림

1차 작성자 : 명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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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정보

1826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성균관(成均館) 통문(通文)
1826년(순조 26) 3월에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1555~1637)의 포장(襃獎)과 관련한 사안으로 성균관에서 영남유림에게 보낸 답통문(答通文)이다. 안동지역에서 올라온 통문에 대해 성균관에서는 유림 여러분이 국왕에게 호소하여 천양받길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상세정보

1826년에 葛峯 金得硏의 襃獎과 관련한 사안으로 成均館에서 嶺南儒林에게 보낸 答通文
1826년(순조 26) 3월에 葛峯 金得硏(1555~1637)의 襃獎과 관련한 사안으로 成均館에서 嶺南儒林에게 보낸 答通文이다. 김득연은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안동에 주둔한 明軍의 군량미 보급에 힘쓴 인물이다. 당시 명군의 대장인 經理 楊鎬의 부하 장수들과 교유하여 문장과 덕행으로 그들로부터 추앙받은 바 있다.
이 당시 광산김씨 유일재 문중을 비롯한 영남지역의 유림들은 김득연에게 襃獎과 贈職을 내려달라는 청원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성균관으로 통문을 여러 차례 보냈고, 1824년 2월에는 성균관으로부터 答通文을 받기도 했다.[‘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성균관(成均館) 통문(通文)’ 참조] 그리고 같은 해 7월 1일에서는 도산서원에서 조정에 상소를 올려 추증과 시호를 요청하자는 내용의 통문을 보냈고,[‘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도산서원(陶山書院) 통문(通文)’ 참조], 윤7월에는 병산서원에서 이에 동조하는 통문을 보낸 바 있다.[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병산서원(屛山書院) 통문(通文)]
본 통문 역시 안종지역에서 보내온 통문에 대해 회답하는 통문이다. 성균관의 掌議와 有司는 1824년에서 보낸 통문과 마찬가지로 갈봉 김득연의 충절이 수백 년간 묻혀 있다는 것은, 公議가 없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안동 유림 여러분들이 국왕에게 호소하여 闡揚받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26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성균관(成均館) 통문(通文)

答通文。
右文爲回諭事。伏以。葛峯先生金公。道學文章。巍勳盛蹟。備載於天朝將士之二幅碑文。而此非一人一家之私言也。
儘是天下之公論也。今其遺文手筆。尙留萬曆餘光。而其中遊聖門三字。可驗平日學力之見重於華人具眼。則
我東方稀異之蹟。孰有加於此哉。又其晩年。節義發於詞章。曷歸寧死等語。隱然有我安適歸之意。
朝家之徵命前後三至。而皆不起。則高風卓節。令人起敬於千載之下矣。褒崇易名。宜無所不可。而迄今數百餘年。幽
鬱不章。不但多士之慨苑。抑亦朝家之闕典也。方發一通。以警嶠南章甫。而封章之擧。適此而發誠哉。公議之不可
泯也。孰敢貳意於其間哉。伏願僉君子剋日呌閽。俾闡百世幽光。幸甚。
右文敬通于
嶺南儒林。
丙戌三月 日。太學掌議。金。[着名] 有司。趙。[着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