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도산서원(陶山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7+KSM-XF.1824.4717-20150630.019526000006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도산서원, 주계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24
형태사항 크기: 113.3 X 78.3
장정: 낱장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와룡 광산김씨 유일재종택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관련자료

1824~1826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통문(通文)
이 문서는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을 포장하는 것과 관련하여 작성된 통문으로, ①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성균관(成均館) 통문(通文), ②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도산서원(陶山書院) 통문(通文), ③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병산서원(屛山書院) 통문(通文), ④1826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성균관(成均館) 통문(通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동 와룡 광산김씨 유일재종택에 소장되어 온 자료이다.

김득연은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안동에 주둔한 명군의 군량미 보급에 힘쓴 인물로서 명군의 대장인 경리 양호의 부하 장수들과 교유하며 문장과 덕행으로 추앙받은 바 있는 인물이다.

김득연의 포상과 관련하여 광산김씨 유일재 문중을 비롯하여 영남의 유림들은 김득연 포장과 증직을 내려달라고 청원운동을 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로 명나라 자수가 지은 비문의 서문에 김득연의 덕행을 칭송한 사실이 있으며, 이러한 내용을 기재하여 성균관에 통문을 보낸 것이다. ①번 문서는 이에 대한 통문에 대해 회답하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성균관 장의와 유사는 김득연의 충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은전의 흠결이고 여론이 억울할만한 일이라고 하면서 안동의 유림들이 국왕에게 호소하여 포장 받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②번 문서는 도산서원에서 주계서원으로 보낸 통문인데 김득연의 행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문서에는 김득연이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켜 사기를 북돋았고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명나라의 병사를 대접하고 방어에 임하면서 지역을 보호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또한 명나라 장수로부터 칭송을 받은 것인 양호(揚鎬)가 김득연에게 시를 증여한 사실이 있음을 말하면서 그 시에 '유자 학정주(孺子 學程朱)'라는 문구를 통해 이는 명나라 장수에게서 허여 받은 것이므로 김득연의 언행에 중국인이 깊이 경복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앞으로는 창의하여 목숨을 바치는 충성이 있었으며 뒤로는 의리를 지켜 자정하는 절개가 있는 김득연을 중국인은 경복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숭장(崇獎)하는 바를 모르고 수백년이 흘렀음을 안타까워하면서 기한을 정하여 상소를 작성해 조정에 올려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달라는 요청을 하려고 한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이 통문은 62명이 연명하여 작성한 것이다.

③번 문서는 병산서원에서 작성한 것으로 도산서원에서 건의한 상소를 올리자는 견해에 동조한 글이다. 이 문서에는 김득연이 인조반정 당시의 행적이 기재되어 있다. 김득연은 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응하지 않았으며 같은 뜻을 가진 동지가 없음을 한탄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서술하였다. 당시 김득연과 마음을 나눈 동료는 문정공(文貞公)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이 있었는데, 계첩(稧帖)을 만든 바 있다고 하였고,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1674~1756)이 당시의 일을 서술하여 칭송한 바 있다고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김득연의 의절이 드러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상소를 올리자는 발의에 찬성하며 날짜를 정하여 상소를 올릴 때 참여하겠다고 하면서 113명이 연명하여 이 통문을 작성하였다.

④번 문서는 2년이 지난 1826년에 성균관에서 보내 온 답통이다. 이 통문에서도 성균관 장의와 유사는 김득연의 충절이 수백년 동안 드러나지 않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공의가 없을 수 없으니 반드시 국왕에게 호소하여 천양(闡揚) 받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문서

번호

자료명

발급

수취

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성균관(成均館) 통문(通文)

성균관

영남유림

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도산서원(陶山書院) 통문(通文)

도산서원

주계서원

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병산서원(屛山書院) 통문(通文)

병산서원

 

1826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성균관(成均館) 통문(通文)

성균관

영남유림

1차 작성자 : 명경일
펼치기/감추기

안내정보

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도산서원(陶山書院) 통문(通文)
1824년(순조 24) 7월 1일에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1555~1637)의 포장(襃獎)과 관련한 사안으로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주계서원(周溪書院)에 보낸 통문(通文)이다. 김득연의 평소의 덕망과 임진왜란기의 공적을 자세히 말하고, 조정에 상소를 올려 추증과 시호를 요청하자고 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상세정보

1824년에 葛峯 金得硏의 襃獎과 관련한 사안으로 陶山書院에서 周溪書院에 보낸 通文
1824년(순조 24) 7월 1일에 葛峯 金得硏(1555~1637)의 襃獎과 관련한 사안으로 陶山書院에서 周溪書院에 보낸 通文이다. 김득연은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안동에 주둔한 明軍의 군량미 보급에 힘쓴 인물이다. 당시 명군의 대장인 經理 楊鎬의 부하 장수들과 교유하여 문장과 덕행으로 그들로부터 추앙받은 바 있다. 이 당시 광산김씨 유일재 문중을 비롯한 영남지역의 유림들은 김득연에게 襃獎과 贈職을 내려달라는 청원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성균관으로 통문을 여러 차례 보냈고, 1824년 2월에는 성균관으로부터 答通文을 받기도 했다.[‘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성균관(成均館) 통문(通文)’ 참조]
도산서원은 본문에서 김득연의 詩와 禮, 학문에 대한 명성과 평소의 바른 품성과 축적된 자질은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임진왜란 동안 쌓은 공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龍蛇의 난(=임진왜란)이 닥치자, 의병을 일으켜서 士氣를 북돋았으며, 義倉을 설치하여 명나라 병사를 대접했다. 중앙에 배열해 있으면서 나가서는 방어에 입하고 들어와서는 지역을 보호하였다. 花山(=안동) 전체 地境이 영남 6진 가운데서 홀로 온전히 보전될 수 있게 하였는데, 이는 누구의 힘이었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리고 명나라 장수 楊鎬로부터 칭송받은 일을 말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명나라 장수로부터 稱賞을 받은 것은 經理 楊鎬가 詩를 증여한 것을 통해 볼 수 있다. 거기에 ‘孺子 學程朱’라는 문구가 있었다. 아! 공께서는 구석진 나라의 일개 鄕將일 뿐이었는데, 군대의 규율과 운영 이외에 ‘學程朱’ 세 자를 허여 받은 것이다. 이는 그의 언행에 중국인이 깊이 경복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병에 관한 일이 모두 그의 학문으로부터 이루어져 나온 것이었기에 크게 볼만한 것이어서, 朱 ․ 張 ․ 陳 세 종사관이 서문을 지어 증여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 공로를 기념하는 비문을 지어 손수 정갈하게 써서 비석을 세워 영구히 보존하려고 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칭송은 명나라 장수의 의병장 金千鎰의 제문을 지어준 것에 비하여 더욱 빛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석은 현재 후손들에게 남겨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 명나라 군대가 급히 돌아가는 바람에 일을 성사시킬 경황이 없었고, 김연득 공께서 겸허히 물러나 있으면서 의병을 일으킨 과거의 일은 다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문에서는 이어서 이와 같이 앞으로는 倡義하여 목숨을 바치는 충성이 있었고 뒤로는 의리를 지키며 自靖하는 절개가 있는 葛峯 선생을 다만 중국인만 경복하고 우리나라에서는 崇獎하는 바를 결여하고 있는 이 사태가 수백 년이 되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에 기한을 잡아 모두 모여 상소를 작성해 조정에 올려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달라는 요청을 하려한다고 말하고 있다.
통문에는 도산서원의 원장인 李龜孫을 포함하여 62명이 연명하고 있다.
1차 작성자 : 명경일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24년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포장(襃獎) 관련 도산서원(陶山書院)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伏以。遺逸而有道學忠志之懿。則士林尊尙之。曠世而有勳業風節之卓。則朝家褒賞之。此蓋出於好德之
彛情。彰善之徽典。所不可已者也。竊惟葛峯先生金公。以詩禮簪纓之世。早遊賢師之門。學有淵源。行著鄕邦。平日見得之正。
蓄積之素。固無待於生等之所覼縷。而逮夫龍蛇之亂。倡義旅而鼓動士氣。設義倉而給饗天兵。鋪置中窾。出禦入保。使花山一境。
獨全於嶺下六鎭之中者。伊誰之力歟。至今。功在人心。傳之野乘。而第以天將之所稱賞者。觀之楊經理鎬。以詩贈之。而有孺子學程朱之
句。噫。公卽褊邦之一鄕將耳。乃於師律戎籌之外。必以學程朱三字見許。則其言行動止之間。深有敬服於華人具眼。而義旅一事。都是學問中做
出來者。大可見矣。至於朱張陳三從事。旣作序文而贈之。又別撰紀功碑文。手自淨寫。欲爲竪石永久之圖。未知龍蛇將相得此於華人者。惟河上
再造江山四大字外。更有何家哉。雖以如金公千鎰之偉烈卓節。而天將之所施之者。不過作文以祭而已。則惟此碑文一本。增重東土。輝映天下。而獨
惜乎。未及繡石藏在本孫巾衍中。此雖當日天兵遽歸。事有未遑。而無亦由於公自不居委曲謙退之所致歟。不寧惟是兵燹旣平。公以野服黃
冠。敎授河汾。不復道義旅往事。而乃於丙子城下之後。朝家之徵命三至。而終不一起。晦迹薇山。以終餘年。其笛留匣釰曷歸寧死等詩語。足見千古慷
慨之志。而其樹立之大。義理之嚴。又有難於八年義旅之勞者。向與天將講磨春秋之義。於盾墨釰燈之暇者。眞不孤負於是日矣。前有倡義效死之忠。
後有守義自靖之節。一身兩美。若是奇偉。而徒見華人之艶服。尙欠本朝之崇獎。居然數百餘載。一任埋沒。此恐以本家諸賢體念不起之遺意。有歉於隨
俗申請。而不起卽當日義也。闡揚卽今日責也。秪恐歲月滋久。偉蹟仍晦。則輿情之慨鬱。邦典之欠闕。當如何哉。玆敢以高山景行之思。全嶺百年之議。
有所仰復於貴鄕僉君子。伏惟堂堂大論不謀。而同幸與吾黨同志者。剋期齊會。治疏叫閽。以請貤贈節惠之典。使我葛峯先生忠勳節義
不至終泯。千萬幸甚。
右文通
周溪書院。
甲申七月初一日。陶山書院。院長。李龜孫。會中。金是瓚李頤淳李龜星李龜澤琴汝稷李龜煥李元淳李師愚李晦淳李龜恒李彙進李仁淳李彙陽
李時靖李龜時金魯翼金是珍金行敎琴魯述琴詩述申思默李大淳李師聖李正夏李進淳金是珩金昌敎
金倫敎李遇淳李日淳任希浩李謙淳李彦淳金濟德金衡敎金濟漢李同淳李彙明任百源金養鼎金養元
李師延李箕燮李奎燮李能夏李彙玉李彙鳳李孝淳李殷淳李宗愿李詩夏李元行任希洙李宗模金星鍊
金永衎琴載述。製通。李老淳。寫通。金濟寧。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