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양력 10월 30일, 전 참봉김창섭 외 7인이 풍북면성조동 선산 근처에 투장한 분묘에 대해 처리해 줄 것을 안동군수에게 연명으로 촉구한 문서
[내용 및 특징]
1907년(純宗 1) 10월 30일, 豊北面五美洞에 사는 전 參奉金昌燮 외 7인이 풍북면聖助洞 선산 근처에 투장한 2기의 분묘에 대해 법전에 따라 처리해 줄 것을 安東郡守에게 연명으로 촉구한 문서이다. 동년 7월경에 주인을 알 수 없는 2기의 무덤이 선산 근처에 투장되었는데, 1기는 선산의 內靑龍에서 수십 보 정도 떨어진 곳에 밖에 있고, 1기는 족인 金洛廣의 부모 산소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이 소지를 올린 것이다. 『續大典』에는 투장묘에 대해 처벌조항을 “士大夫의 분묘는 그의 품질에 따라 각각 步數가 있으므로 禁法을 무릅쓰고 투장하는 자는 법에 의하여 발굴하여 옮긴다.”고 규정하였다. 김창섭 등은 바로 이 규정을 적용하여 줄 것을 안동군수에게 요청한 것이다.
김창섭 등이 안동군수에게 투장한 곳의 점유권이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 근거로 내세운 것은 “年久禁養”, “先山靑內龍數十步許”, “親山壓腦之地”로, 이는 산지 점유자가 산송 관련 문서에서 산지의 점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빈번하게 내세우는 말이다. 『經國大典』에서는 품계에 따른 步數를 규정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에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산송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면서 산송에 대한 몇 차례의 受敎가 내려져 『속대전』에 송사의 절차, 심리의 원칙, 판결의 시행에 대한 조항으로 실리게 된다. 안동군에서는 24일에 접수하여 투장묘를 독촉해 파가도록 도형을 그려오라는 題音을 내렸는데, 당시 안동군수를 대신하여 署理郡守郡主事가 내렸다.
이 문서는 근대 공문서의 변화된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먼저 12행의 붉은 괘선이 인쇄된 규격용지에 쓰고, 문서 중앙의 版心에 “安東郡訴訟紙”라고 인쇄되어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이전의 소송문서들은 크기와 재질에 대한 특별한 규정이 없었는데 갑오개혁기를 전후로 소송지에 대한 규정이 만들어지고 용지수수료를 징수하였다. 또한 중국 연호 대신 우리나라 純宗의 연호를 쓰고, 국한문을 혼용하였으며, 서명 방식이 署押 대신 도장을 찍는 것으로 바뀌었다. 특이한 것은 문서를 올린 사람들은 양력을 쓰고 있는 반면 제음을 내린 관에서는 음력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근대로의 이행과정에서 생기는 과도기적인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지를 올린 10월 30일은 음력으로 9월 24일이다. 소지가 올라온 날 바로 안동군에서는 제음을 내렸는데, 이에 대한 처리를 보여주는 2건의 문서가 있다. 9월 25일과 10월 21일에 풍북면新陽洞에서 올린 牒呈이 그것이다.
자료적 가치
갑오개혁 이후의 변화된 공문서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오미리(오미동)는 원래 풍산현에 속하였으나 1895년 안동군 풍북면에 편입되고 1914년 부, 군, 면 통폐합에 따라 괴정리의 일부와 예천군 위라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오미리라 하였다.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풍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행정구역이 안동시 풍산읍에 속하게 되었다. 오미동은 뒤로는 학가산의 한 갈래인 죽자봉을 배산으로 하고 동(東)으로는 아미산을 좌청룡으로 삼고 서(西)로는 도인산을 우백호로 삼은 명당터에 자리잡은 풍산김씨 500년 세거지이다. 풍산 김씨가 이곳에 정착한 것은 김자순 때부터이다. 이때에는 마을 이름을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 있다고 해서 오릉동(五陵洞)이라 불렸다. 그 후 김의정이 을사사화 후에 낙향하여 오무동(五畝洞)으로 고쳤는데 능이란 글자가 언덕을 뜻하지만 임금의 무덤을 뜻하기도 해서 이랑 무(畝) 자를 넣어 오무(五畝)로 고쳤다. 그후 김대현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5형제는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 임금이 팔연오계(八蓮五桂)라 하여 오미동이라는 지명을 하사하게 되자 오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韓國法制史攷』, 朴秉濠, 法文社, 1983
『朝鮮後期 山訟 硏究』, 全炅穆, 전북대박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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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 公文書의 誕生』, 김건우, 소와당, 2008
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