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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11월 16일
| 憲宗12
| 丙午
청하(淸河)에 답신을 써서 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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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년 3월 9일
| 純祖25
| 乙酉
|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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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년 3월 21일
| 純祖25
| 乙酉
|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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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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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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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가 진주에 도착하였다. 마침내 감옥에 들어갔다. 곽사유도 같이 들어갔다. 벗 박숙연(朴淑然 : 수익受益)과 벗 이대윤(李大允 : 명권命權) 등 여러 벗들도 모두 안핵사(按覈使) 박규수(朴珪壽)의 무고(誣告)로 인해 체포되어 유배되는 곤액을 당하였다. 저물녘에 이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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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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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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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이 단성읍에서 바로 출발하였다. 엄한 왕명이 내려와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고, 연일 비가 쏟아지는데다 노자도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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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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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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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방되어 밤에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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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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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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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의 지구(知舊)들과 친척들이 찾아와 위로해 준 이가 많았는데, 이름을 다 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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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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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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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모(할머니)의 기일이다. 무단히 일을 일으켜 법에 걸려 제사를 폐하게 되었으니, 한 밤중이 되자 마음이 상하였다. 후회한들 어쩔 것인가? 정언이 저물녘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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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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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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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벗들을 환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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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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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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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하였다. 법장(法庄)에 이르러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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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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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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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교(佳作橋)를 거쳐 월평(月坪) 김참봉(경휴景休)의 집을 지나쳤다. 내가 을묘년(1855) 여름에 지도(智島)를 갈 때 방문하여 안면이 있으나, 오늘의 이 행색으로야 무슨 낯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그냥 지나쳐 왔다. 장승점(長承店)에 도착하였다.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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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6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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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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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에 어사가 있는 곳으로 잡혀 끌려가서 비할 수 없는 욕을 당하였다. 그러나 독한 형벌은 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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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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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 비
식후에 진주목사가 감영으로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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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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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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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관패(官牌)에 의해 체포되었다. (비변사 공문이 순영에 도착하였고, 순영의 공문이 본읍에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밤에 갑자기 곽란(霍亂)이 크게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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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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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 갬.
삼가로 향해 가려고 계사(溪舍)에 들어가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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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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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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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이 귀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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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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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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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를 보내라는 공문이 도착하였는데, 배소는 영광 임자도로 정해졌다. 삼가읍 호장(戶長) 이덕규(李德奎), 이방(吏房) 이낙훈(李洛勳), 형방(刑房) 염덕호(廉德虎)가 자못 정성을 표시해 주니,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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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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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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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룡(雲龍)에 있는 산소에 성묘하였다. 물레방아 점[水碓店]에 이르니 집안 친척들과 벗들, 마을의 나이 많으신 어른들이 눈물을 뿌리며 전송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장을 이룬 것 같아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재종형님과 재종 조카 우서(禹瑞 : 우瑀), 사형(士衡)이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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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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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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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후에 여러 종친들과 헤어져 곧바로 부내(府內)로 들어갔다. 종친인 경선(景善)이 뒤따라 와 함께 관청으로 갔다. 부질없이 호장소(戶長所)에 공사(公事)를 부치느라 신표(信標) 내어 보였다. 임자도로 가려고 입석점(立石店)에 이르러 울타리 남쪽을 바라보니 맑고 깨끗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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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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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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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한섭(卓漢燮)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