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9년 2월 4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구름 끼고 흐리다.
저녁에 종손(從孫) <인명>낙주(洛周)인명>가 <지명>달성(達城)지명> 감영으로부터 호방(呼榜)하며 오니 조금 가라앉은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좌도 동당방(左道東堂榜): <인명>이능선(李能璇)인명>【<지명>경주(慶州)지명>】, <인명>권재형(權載衡)인
-
1859년 2월 12일
| 哲宗10
| 己未
| 저녁에 구름 끼고 흐리다.
종손(從孫) <인명>낙중(洛中)인명>이 <지명>한양지명>에서 내려왔다. <인명>(洛周)인명>낙주가 모임에 나가 가질(家姪)의 편지를 얻어 보니 최근 무탈함을 알았다.
-
1859년 2월 20일
| 哲宗10
| 己未
| 약한 바람이 습습하고 비 조짐도 상쾌히 개다.
계아(季兒)를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필시 무슨 연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매우 조급하고 답답했다.
-
1859년 2월 28일
| 哲宗10
| 己未
<지명>서촌(西村)지명>에서 <인명>박희인(朴熙仁)인명> 우(友)가 내방했는데, 이 친구가 근일 집을 옮겼기 때문이다. 들으니 또 건해(乾亥) 방향에서 출현하였으나 그 빛이 지난 가을 보다 짧았다고 했다.
-
1859년 3월 7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미풍이 불고 춥다.
강정 생군(江亭甥君)이 죽었다. 초 9일에 애사(哀辭)를 써서 중아(仲兒) <인명>수흠(守欽)인명>을 보냈다. 험한 세상에 짐을 싸서 가니 실로 걱정이 많았다. <지명>우천(愚川)지명> 하인이 왔다 돌아갔다.
-
1859년 1월 21일
| 哲宗10
| 己未
<지명>유곡(酉谷)지명> 사형(査兄) <인명>권재기(權載基)인명>가 하인을 보내 편지로 안부했고, <인명>권수도(權璲度)인명> 형도 편지로 문안했으며, <인명>권병연(權秉淵)인명> 형, <인명>권대연(權大淵)인명>, <인명>권노연(權魯淵)인명>이
-
1859년 2월 2일
| 哲宗10
| 己未
| 새벽에 또 천둥소리가 났다.
곧 경칩(驚蟄)이다. 이는 바로 양기가 막 생겨나 천둥이 어룡(魚龍)을 움직이는데, 적막한 마음인가?
-
1859년 2월 10일
| 哲宗10
| 己未
<지명>묵계(默溪)지명> 상사(上舍) <인명>김여용(金汝用)인명>이 역방(歷訪)했다. 오전에 가아(家兒)들이 모두 돌아왔다. 지난 가을 <지명>영서(嶺西)지명>의 농사는 큰 흉년에 이르지 않았으나 도로의 상황이 좋지 못해 날이 저물지 않아도 다니는 것이 끊어
-
1859년 2월 18일
| 哲宗10
| 己未
| 날씨가 점차 따스해지다.
사방에 쟁기와 보습을 가지고 나왔으니 봄씨뿌리기는 수일간에 마칠 수 있을 듯했다. 헐렁한 옷을 입은 빈민들은 손가락을 꼽으며 보릿고개를 계산할 것이다.
-
1859년 2월 26일
| 哲宗10
| 己未
| 따뜻하다.
부리(府吏) <인명>김영순(金永順)인명>이 찾아왔다. 조정에서 결정한 일로 도서원(都書員)에게 패(牌)를 부쳤다. 들으니 감회시(監會試)의 방노(榜奴)가 문 앞길을 지났다고 했다.
-
1859년 3월 5일
| 哲宗10
| 己未
| 구름 끼고 흐리다. 밤에 큰 바람이 불다.
유곡 부(酉谷婦)가 해산 후 14일이나 되었으나 여전히 증세가 있어 완쾌할 기약이 없어 고민스럽다.
-
1859년 3월 13일
| 哲宗10
| 己未
| 가랑비가 종일 내리다.
땅이 낮고 축축한 밭에는 씨앗뿌리기가 염려된다. 큰 흉작의 여년에 수확하지 못한다면 불쌍한 빈민들이 어찌 살 수 있겠는가? 동당(東堂)의 방에 고대해도 소식이 없다. 필시 허사로 돌아 간 것이니 탄식하기 않을 수 없다. 적막함을 풀기위해 노비들로 하여금 채마밭과 울타리
-
1859년 3월 21일
| 哲宗10
| 己未
<지명>감현(甘縣)지명> 족숙(族叔) <인명>종각(宗珏)인명>씨가 편지로 문안 해 와 나도 서화첩을 만들어 등송(謄送)했다. 일용공(一慵公) 육로회(六老會)는 휘함한다. 【육로계회(六老禊會): 일용공(一慵公), 류 졸재공(柳拙齋公), 학계공(鶴溪公), 별좌(別座
-
1859년 3월 29일
| 哲宗10
| 己未
| 아침부터 구름 끼고 흐리다.
<지명>우천(愚川)지명> <인명>류여목(柳畬睦)인명> 군(君)이 귀가했다. 가동(家僮)들이 줄지어 서쪽 고랑을 갈았다. 세 아들은 <지명>우안(愚安)지명> 추재(楸齋)에서 돌아왔다. 글자 가르치기가 끝났기 때문이다. 백종존(伯從孫) <인명>낙주(洛周)인명
-
1858년 10월 17일
| 哲宗9
| 戊午
미시(未時)에 왕세자가 탄생하니 신민(臣民)들이 경하하고 박수침을 어찌 그 다함이 있겠는가?
-
1859년 1월 2일
| 哲宗10
| 己未
짐을 꾸려 사은숙배 길에 가려는데, 늦은 아침 가질(家姪)의 편지가 <지명>지곡(枝谷)지명> 권 형(權兄)이 내려오는 편에 왔다. 그 편지를 보니 형세로 보아 정조(正朝)의 제향(祭享)에 미치기 어려울 것 같아 지난 해 말에 아뢰어 바뀌었다고 하니 참으로 무거운 집
-
1859년 1월 23일
| 哲宗10
| 己未
<지명>갈전(葛田)지명> <인명>권도(權燾)인명> 형, <인명>안병추(安秉樞)인명> 형이 문안을 왔다.
-
1859년 2월 3일
| 哲宗10
| 己未
| 비로소 봄기운이 있다.
문중 마을 여러 유생들이 모두 경과(京科)에 실패하여 쓸쓸함이 매우 심하다. 아침 소문을 들으니 조금 불안한 조짐이 있었는데, <인명>권합(權閤)인명>이 <지명>연산(連山)지명>에 부처(付處)되었다고 했다.
-
1859년 2월 11일
| 哲宗10
| 己未
족제(族弟) <인명>경회(景會)인명> 또한 <지명>한양지명>에 갔다가 돌아와 저녁에 들렸다. 들으니 정월 27일 세자 백일 기념 과거에서 주상이 친히 향유(鄕儒)들을 발탁했다고 한다. 【<지명>칠곡(漆谷)지명> <인명>정기용(鄭己龍)인명>과 <지명>제주(
-
1859년 2월 19일
| 哲宗10
| 己未
| 온화하다. 저녁에 비올 기미가 있다.
이른 아침에 계아(季兒)를 부(府)로 보내 제반 집안 살림을 헤아리게 했다. 또 두 놈을 시켜 패(牌)로 <지명>헌읍리(軒浥里)지명> 풍헌(風憲) 김가 놈【<인명>광용(光用)인명>】을 불러 민결(民結)을 작간(作奸)한 것으로 문책했다. 오늘 저녁으로 고환(羔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