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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16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서늘한 기운이 들었으나 아침 이후에 날씨가 매우 더워 7월 10일 상간의 무더위와 다를 바 없다.
<지명>배감점(盃酣店)지명>에서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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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24일
| 哲宗10
| 己未
이른 아침 또 직소(職所)로 향했다가 왔는데, 추위가 몸을 침범했다. 오늘 아침부터 태위장(太衛將)의 별가(別家)에서 기식(寄食)했다.【세 사람이 기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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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3일
| 哲宗10
| 己未
| 맑다.
입직(入直)했다. 직장(直長) <인명>김형집(金亨集)인명>에게 편지를 부쳤는데, 그의 집은 <지명>정동(貞洞)지명>의 작은 땅에 있고, 이름은 이화장기(梨花庄基)라고 한다. 저녁에 약을 복용하는 일 때문에 담당 당상관(堂上官)이 퇴청(退廳)하지 않았는데도 나왔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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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11월 25일
| 哲宗8
| 丁巳
소실(少室)이 친정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사성(四星)은 정사(丁巳), 임자(壬子), 임인(壬寅), ○해(○亥)이고 <인명>정길(丁吉)인명>이란 이름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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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2월 22일
| 哲宗9
| 戊午
이 깨무는 것은 점차 나아졌고 인사(人事)를 대략 알아봤다. 죽을 마시도록 나만 권한 것이 아니다. 이로부터 걱정을 덜었다. 밤에 눈을 붙이려니 온 뼈가 모두 아파 한시도 누워 지낼 수 없었다. 60평생을 돌아보니 문득 느껴지는 지리(支離)함을 어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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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6월 1일
| 哲宗9
| 戊午
| 비로소 큰 비가 내리다.
하늘에서 한 방울의 물도 내리지 않은지 석 달이나 되어 온 산의 초목 또한 말라비틀어졌으니 삼농(三農)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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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23일
| 哲宗10
| 己未
| 바람이 크게 불다.
저녁에 반주가(泮主家)에 들어갔는데, 먼지바람이 눈을 가려 갈도(喝道)를 따라 가니 망칠(望七) 나이의 늙은이의 행색이 매우 우습다. 저물녘에 승선(承宣) <인명>류재가(柳載可)인명>를 방문하였고, 또 <지명>지곡(枝谷)지명> 권 아(權雅)를 방문했다. 반주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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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2일
| 哲宗10
| 己未
아침에 임금이 금보(金寶)를 어람(御覽)하는 일 때문에 왕의 홍련(紅輦)을 모시고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적봉(赤棒), 홍삽(紅翣)과 내인(內人), 어졸(御卒)들, 크고 작은 기치(旂幟)들이 앞에 나열되어 있었고, 갈도(喝道)를 내세워 대로(大路)를 지나니 망칠(望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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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10일
| 哲宗10
| 己未
| 구름 끼고 흐리다.
입직(入直)했다. 괴질(恠疾) 때문에 소요가 나날이 심해졌다. 병조(兵曹) 서리(書吏) <인명>김연구(金鍊九)인명>가 ‘옥보문(玉寶文)’ 2폭(幅)을 인출하여 주었다. 모든 출입할 곳이 있어도 말이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니 매우 고민되고 고민된다. 족질(族姪)이자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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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2월 18일
| 哲宗9
| 戊午
처음으로 병세가 줄어들었으나 남은 열이 아직도 물러나지 않았다. 헛소리는 조금 그쳤으나 추워하고 더워하여 소시호탕(小柴胡湯)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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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4월 3일
| 哲宗9
| 戊午
가질(家姪)이 <지명>현현(玄縣)지명>의 일 때문에 암행어사【<인명>임응준(任應準)인명>】에게 무계(誣啓)되었다는 기별을 듣고 <지명>한양지명>의 떠났는데, 결국에는 의금부에 나가 심리를 받고 <지명>용담(龍潭)지명>에 유배되니 분하고 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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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9월 20일
| 哲宗9
| 戊午
| 영(嶺)의 서쪽에 천둥 번개가 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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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12월 25일
| 哲宗9
| 戊午
오후 <지명>한양지명>의 하인이 왔다. 【바로 집 근처 <지명>수영동지명>에 사는 <인명>김인이(金仁伊)인명>이다.】 가질(家姪)의 편지를 보니 내가 20일 도목정사에서 재릉침랑(齋陵寢郞)에 제수되었다고 한다. 능(陵)은 <지명>송경(松京)지명> 옛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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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4일
| 哲宗10
| 己未
| 저녁에 비가 올 듯하다가 밤에 비가 오다.
가동(家僮)들로 하여금 동남쪽의 마른 논에 두레박으로 물을 끌어 대게 했다. 가질(家姪)이 곡반(哭班)에서 돌아와 참여한 자가 매우 적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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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12일
| 哲宗10
| 己未
| 맑다.
장차 내일 사은숙배(謝恩肅拜) 행을 꾸려서 떠나려고 하는데 여러 행구(行具)들을 갑자기 마련하기 어려웠다. 계아(季兒)를 <지명>예천읍(醴泉邑)지명>으로 보내어 말과 가마꾼을 세를 내어오게 하였는데, 밤늦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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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20일
| 哲宗10
| 己未
아침에 본주(本主) <인명>홍문환(洪文煥)인명>이 새로 산 집으로 정했다. 배하인(陪下人) <인명>한학금(韓學金)인명>이 아들 <인명>수흠(守欽)인명>을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니, 가고 머무는 서글픔이 없지 않다. 승지(承旨) <인명>이만운(李晩運)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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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28일
| 哲宗10
| 己未
이불을 가지고 입직(入直)했다. 습의(習儀) 때 금관복(金冠服)을 입는 것에 관한 일로 승선(承宣) <인명>류재가(柳載可)인명>에게 편지를 부쳤는데 답장을 보니 매우 낭패로 여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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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7일
| 哲宗10
| 己未
| 날씨가 조금 온화하다.
입직(入直)했다. 정랑(正郞) <인명>김상희(金相喜)인명>가 『대왕대비옥책(大王大妃玉冊)』, 『왕대비옥책(王大妃玉冊)』 인출 본 2건(件)을 가지고 와 전해 주었는데, 일전에 비록 직접 부탁한 것이나 그가 마음에 새겨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또 오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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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12월 23일
| 哲宗8
| 丁巳
<지명>금곡(金谷)지명> 진사(進士) <인명>박기녕(朴箕寧)인명> 장(丈)의 양례(襄禮)일이다. 이 장(丈)은 문학에 조수(操守)하여 평소 존경했던 터라 눈물 흘리며 쓴 뇌문을 들려 계아(季兒)를 보냈다. 추위를 무릅쓰고 <지명>능천(能川)지명> 골짜기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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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3월 5일
| 哲宗9
| 戊午
<인명>정길(丁吉)인명>의 백일이다. 비로소 방천(防川)에 반경좌(班景座) 일을 시작했다, 일색(日色)이 매우 성하여 역정(役丁)들이 모두 모래먼지를 뒤집어쓰니 모두 귀신 모습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