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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7월 20일
| 哲宗10
| 己未
| 침 전에 서늘한 감이 크게 있다.
부(府)에서 면주(面主) 놈이 감영의 공문을 가져와 보여주는데 과객들이 무리지어 <지명>어촌리(漁村里)지명>에 침입하는 것을 엄금하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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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7월 28일
| 哲宗10
| 己未
| 무더위가 점차 가혹하다.
밤에 <인명>두보(杜甫)인명>의 시를 암송했다. 7월 6일 폭염에 고생하다 밥을 마주하여 얼른 말아 먹었다. 그래도 허리띠를 묶고 발광할 수 없어 두꺼운 얼음의 토막이라도 밟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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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7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또 가랑비가 내리다.
목수를 시켜 말구유[馬櫪]를 만들게 했다. 아이들이 연이어 밤에 경사(京師)에 있는 꿈을 꾸니 아마도 차아(次兒)가 머지않아 환가(還家)할 것 같다. 채 아(蔡兒)가 병으로 누운 지 이미 3일인데 그의 증세가 양기(陽氣)가 허(虛)한데서 나와 아마도 상한 듯하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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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15일
| 哲宗10
| 己未
<지명>용원(龍院)지명>에서 묵었다. 낮에 <지명>조원(棗院)지명>을 지나는데 길이 매우 바빠 <인명>여진(汝鎭)인명> 족숙(族叔)에게 가보지 못했으니 유감스러움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길가에는 풍년이 들었으니 매우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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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7월 11일
| 哲宗10
| 己未
| 태양이 매우 뜨겁다.
매일 지내기가 매우 힘들었다. <지명>남흥(南興)지명> <인명>안행직(安行直)인명> 형이 내방했다. 반촌 하숙집 주인 <인명>무안(務安)인명>이 내려와 <지명>한양지명> 쌀값이 점차 내려왔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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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7월 19일
| 哲宗10
| 己未
계아(季兒)가 한양으로 출발했다가 얼마 되지 않아 비를 만나 여정을 따져보니 <지명>경진(京津)지명>에 도착했을 것 같은데 비를 만났을 것인데 이러한 때에 장마와 더위가 물러가지 않으니 먼 걸음이 매우 우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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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7월 27일
| 哲宗10
| 己未
| 갑자기 날씨가 매우 무덥다. 종일 한 점의 바람도 없어 놓인 화로 같다.
삼부(三婦)가 무더위에 구토하였고 작은 손자 또한 복통을 앓는 것을 보니 매우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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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6일
| 哲宗10
| 己未
| 오전에 가랑비가 내리다가 이어서 구름 끼고 흐리다. 밤에 또 비가 오다.
<지명>법전(法田)지명>으로 간 하인이 돌아왔으나 편지 끝에 <지명>동래(東萊)지명>에 의심 가는 선박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었으니, 이는 그 일을 기휘(忌諱)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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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14일
| 哲宗10
| 己未
<지명>조령(鳥嶺)지명>을 넘으려 했으나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하여 저물녘에 <지명>동화원(東化院)지명>에서 묵었다. 대개 낮에 <지명>유항(楡項)지명>에서 쉰 것 때문에 30리(里) 정도 손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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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22일
| 哲宗10
| 己未
이른 아침 도감소(都監所)에 입직(入直)했다. 투자(投刺)하여 담당 당상관(堂上官)들을 뵈려 했는데, 그들은 곧 호판(戶判) <인명>이경재(李景在)인명>, 예판(禮判) <인명>정기세(鄭基世)인명>, 이판(吏判) <인명>남병철(南秉喆)인명>, 공판(工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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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1일
| 哲宗10
| 己未
이른 아침 입직(入直)했다. 위장(胃腸)의 기운이 크게 변하여 여간 식사를 해서는 모두 맛을 알지 못했다. 류 령(柳令)이 오늘 하향하는데 편지로 통지할 생각을 하였으니 대개 사적으로 은근히 부탁할 일이 있어서이다. 신문(新門) 밖에 <인명>이병일(李秉一)인명>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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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18일
| 哲宗10
| 己未
| 구름 끼고 흐리다.
오늘 아침에 비로소 묘시(卯時)에 일하러 들어가는 것을 폐했다. 홀로 숙소에 앉아 있자니 온 몸이 모두 아팠다. 오로지 마음은 다만 고향 뜰 황화(黃花)의 사이에 있으나, 이미 벌어진 일이다. 앞으로의 일을 헤아려 봐도 여전히 수십 일이나 남았고 그 사이에 공고(公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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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6월 20일
| 哲宗10
| 己未
| 비가 그쳤으나 구름 끼고 흐리다.
아이와 젊은이들이 <지명>원촌(遠村)지명>에 두 사람의 신은(新恩) 때문에 <지명>도림(道林)지명>에 가서 주찬(酒饌)을 받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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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6월 28일
| 哲宗10
| 己未
별다른 일이 없었다. 민심 태반이 흉년으로 본성을 잃었다. <지명>강하(江夏)지명>의 삼맥(三麥)이 영글었으나 반으로 나눌 길도 없으니 또한 개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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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7월 6일
| 哲宗10
| 己未
| 구름 끼다.
암자의 승려가 세 아들의 편지를 전해 왔으나 양식이 떨어져 매우 고민스러워 내려오게 했다. 만족스럽지 못해 웃음만 나옴을 어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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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7월 14일
| 哲宗10
| 己未
| 저녁에 약한 비가 내리다.
사뭇 가을 기미가 있어 다행스럽다. 계아(季兒)는 점을 쳐 일을 추심(推尋)하고 신평 빈(新坪賓)과 함께 부(府)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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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7월 22일
| 哲宗10
| 己未
<지명>하상(河上)지명> <인명>류승목(柳承睦)인명>, <인명>류주조(柳周祚)인명> 두 노반(老伴)이 <지명>지곡(枝谷)지명>에서 내방했는데 매우 고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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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1일
| 哲宗10
| 己未
| 동이 틀 새벽 무렵에 적은 양의 비가 오다가 아침 이후 개다.
동이 틀 새벽 무렵에 적은 양의 비가 오다가 아침 이후 갰는데, 한 호미도 오지 않았다. 나물 종자[菜種]는 파종을 마쳤으나 마른 땅도 적시지 못하였으니 묘(苗)를 세우는 희망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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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9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큰 비가 내리다가 늦은 아침에 비로소 개다.
또 집안 하인을 시켜 나누어 소나무를 베게 했다. <지명>위라(位羅)지명>의 서원(書員)에게 보낼 패지(牌旨)를 써서 <인명>범악(範岳)인명>을 보냈으나 저녁에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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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17일
| 哲宗10
| 己未
| 더위가 여전하다.
<지명>판교점(板橋店)지명>에서 묵었다. 가마꾼과 마부가 모두 병이 났고, 나 또한 오전부터 햇곡을 먹었는데, 뱃속이 매우 편치 못해 밤에 수차례 설사를 하고 음식을 먹지 못했으며 밤새 잘 수 없어서 엎치락뒤치락 거리며 베게에 엎드려 있으니 늘그막에 새장가 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