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9년 7월 13일
| 哲宗10
| 己未
<지명>갈전(葛田)지명> <인명>안윤발(安澗發)인명>, <인명>안병로(安秉魯)인명> 형들이 내방했다. 내가 제수된 이래로 문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
1859년 9월 13일
| 哲宗10
| 己未
입직(入直)하기 전에 두 하인을 보냈다. 오늘에야 비로소 당상관(堂上官) 김 훈장(金訓將)을 뵈었는데, 사뭇 돌보아 줌이 곡진했다. 【30민(緡)을 김지홍(金智弘) 집에 저축해 두었다.】
-
1859년 9월 21일
| 哲宗10
| 己未
| 구름 끼고 흐리다.
이른 아침 공조(工曹)의 대청(大廳)까지 걸어갔다. 날씨가 다시 구름 끼고 흐리니 흑기(黑氣)가 번진 듯하다. 그래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홍삼(紅衫), 홍상(紅裳), 후수(後繡)를 빌릴 곳이 없어서 다시 이 태(李台)에게 편지로 고했지만, 상(喪)이 난 집안이니 어찌
-
1859년 6월 23일
| 哲宗10
| 己未
<인명>용흠(龍欽)인명> 조카가 <지명>유곡(酉谷)지명>으로부터 돌아와 사가(査家)의 안부를 전했으나 그 행적을 생각해보니 또한 경악할 만한 말이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
1859년 7월 1일
| 哲宗10
| 己未
| 아침부터 열기가 극심하다.
들으니 <지명>동래(東萊)지명>의 수상한 선박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여 <지명>동래지명> 수령에게 4구의 시를 지어 보냈다【한 구는 "마음을 씻고 않아 물소리를 들을 제"라고 했고 한 구는 "다음 인생 한 고을에서 만나세."라고 했다】. 그 말구에 이르기
-
1859년 7월 9일
| 哲宗10
| 己未
| 아침부터 비가 내리다가 점심때 개다.
사방에서 온 사람들 모두 비올 때 말하다가 볕이 나자 모두 갔다. 온 곡식이 영글었다고 하니 그 다행함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지난밤부터 목이 아픈 증상이 있었다.
-
1859년 7월 17일
| 哲宗10
| 己未
| 종일토록 비오고 흐리다. 오후에 비가 오다가 그치다.
이제 배추 심는 절기가 되었으나 연일 빗물에 잠겨 반도 되지 않아 때를 놓친 탄식이 어찌 없겠는가?
-
1859년 7월 25일
| 哲宗10
| 己未
<지명>구호(龜湖)지명> 묘지기가 화계 족조(花溪族祖)의 답서를 가지고 왔는데, 나의 행공(行公)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에 단자를 부치고 감사 편지를 썼다. 서수(庶嫂)가 토사증으로 위독했다.
-
1859년 9월 12일
| 哲宗10
| 己未
이른 아침 입직(入直)했다. 듣기에 집안 하인 두 명이 동복(冬服)을 지고 올라온다고 하여 동료들에게 통보하고는 급히 나왔다. 가서(家書)를 보니 대소(大小) 여러 식구들 모두 무탈하고 당내(堂內)도 평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종장(宗丈)이 이달 2일 미시(未時)에 숙환
-
1859년 9월 20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구름 끼고 흐리다.
이불을 가지고 입직했다. 습의(習儀)에 참석하지 않아서 종일 외롭고 적막함을 비할 데가 없었다. 밤에 당번(當番) 서리(書吏)를 불러 그로 하여금 포졸(捕卒) 및 사령군사(使令軍士)의 성명을 써서 내게 하였고, 그가 오자 순라(巡邏)를 신칙(申飭)했으니 이는 부묘(祔廟
-
1859년 6월 22일
| 哲宗10
| 己未
| 햇볕이 매우 강하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 듣자니 <인명>한계원(韓啓源)인명>이 동도윤(東都尹)에 제수되었다고 했다.
-
1859년 6월 30일
| 哲宗10
| 己未
저녁 무렵 계아(季兒)가 말을 사서 돌아왔다. 그 길에 들으니 <인명>용흠(龍欽)인명>이 봄에 <지명>백동(白洞)지명>으로 갔다고 한다. 비단 광숙(光叔) 집안에 비해 생경하지 않았다. 내 말 또한 매우 험해졌다. 그는 스스로 깨끗하고 탈속적이라고 하지만 그의
-
1859년 7월 8일
| 哲宗10
| 己未
또 화첩을 배접했다. <지명>반포(反浦)지명> 족제(族弟) <인명>중위(重緯)인명>가 전해오기를 천운정(天雲亭) 주인 <인명>휘대(輝大)인명>의 감사 편지, <지명>감현(甘縣)지명> 족제(族弟) <인명>중두(重斗)인명>의 편지를 받았다.
-
1859년 7월 16일
| 哲宗10
| 己未
| 무더위 기세가 이미 여러 날이다.
청육탕(淸六湯) 세 첩을 복용했으나 매우 견디기 힘들었다. 담(痰)이 채여 가슴이 답답하며 천식으로 매우 곤란했다.
-
1859년 7월 24일
| 哲宗10
| 己未
아침에 <지명>하상(河上)지명>의 두 노반(老伴)과 함께 한참동안 토론을 했다. 차아(次兒)의 여정을 계산해 보니 오늘 입성해야 했으나 그와 말이 혹 도중에 생병이나 나지 않았는가? 이러한 때에 방을 바꾸어가며 집에 있으니 드는 생각이 실로 깊다. <지명>용각(龍角
-
1859년 9월 16일
| 哲宗10
| 己未
| 전날 밤에 바람이 크게 불다.
이른 아침 입직(入直)했다. 한기(寒氣)가 들어 비로소 솜옷을 입었으나 뱃속이 종일 부글거리니 아마도 지난번 위장(胃腸)이 체했던 병의 여증(餘症)인 듯하다. 지금도 편치 못하니, 저녁 이후에 나와서 양위탕(養胃湯) 2첩(貼)을 지어 와 1첩을 달여 먹었다. 전 안기
-
1859년 6월 18일
| 哲宗10
| 己未
| 아침 비가 종일토록 내리다.
고을 수령 <인명>김유연(金有淵)인명>이 향제(鄕題) 1수(首)를 내었는데 이로써 문치(文治)에 족하지 않겠는가?
-
1859년 6월 26일
| 哲宗10
| 己未
다시 논에 김을 맸다. 종손녀(從孫女) 강실(姜室)이 그 시아비의 <지명>동래(東萊)지명> 소식을 탐문하려 <지명>법전(法田)지명>에 팽을 보냈다고 했다. 그가 돌아와도 흑백을 가릴 수 없었다고 했다.
-
1859년 7월 4일
| 哲宗10
| 己未
| 종일 구름 끼고 흐리다.
점심 때 <지명>강릉(江陵)지명> <인명>정태시(鄭台時)인명> 생원이 내방했다고 한다. <지명>우천(愚川)지명>에서 와 전하기를 <인명>명가(明可)인명>가 의릉랑(懿陵郞)에 제수되었다고 했다. 어제 올라 간 채 아(蔡兒) 또한 오늘 돌아 왔다고 했다.
-
1859년 7월 12일
| 哲宗10
| 己未
| 오후에 지나가는 소나기가 내리다가 조금 뒤 개다.
어떤 사람이 <지명>동래(東萊)지명> 수상한 선박이 돌아왔는데, <인명>강진오(姜晉吾)인명>가 무사하여 잔치를 열었다고 했다. 붉은 노가 있는 선박이 다시 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