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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5월 25일
| 哲宗 11
| 庚申
채 아(蔡兒)가 약간 복통이 있고 또 부기(浮氣)가 점차 퍼져 먹으면 위(胃)가 변하여 점점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 <지명>길주(吉州)지명> 의객(医客)을 <지명>하상(河上)지명> 충효당(忠孝堂)에 보내었는데 차아(次兒)가 종일토록 기다려도 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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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0월 11일
| 哲宗10
| 己未
닭 울음을 듣고 일어나 앉아 병(餠)과 죽(粥)으로 요기했다. 의관을 하고 선인문(宣仁門)으로 가니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곧장 들어가 상서원(尙瑞院) 앉자 동료들이 차례로 모였다.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로 들어가 조금 쉬자 백관들이 모두 모였다. 대가(大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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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10월 5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매우 춥고 서리가 눈처럼 내리다.
해가 난 이후에도 <지명>남산(南山)지명>은 항상 운무(雲霧)에 싸여 흐리하게 비췄다. 아침에 매우 춥고, 짙은 서리가 눈처럼 내려서 나뭇잎이 모두 떨어졌다. 대개 올해의 서리는, 여태까지는 된서리[肅霜]가 없어서 나뭇잎들이 다만 붉고 말랐으나 떨어지지는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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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30일
| 哲宗10
| 己未
| 날씨가 음려(陰沴)하다. 밤에 소나기가 오다.
음려(陰沴)의 기운으로 아침에 <지명>잠두봉(蠶頭峰)지명>을 바라봐도 산의 형체도 보이지 않으니 기상(氣像)이 시름겹고 참담하다. 오늘 아침에 또 붕어[鮒魚] 5마리를 사서 사람을 시켜 푹 달이게 하였고, 또 미음을 만들게 했으나 위장(胃腸)이 냉(冷)한 것이 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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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15일
| 哲宗10
| 己未
| 가랑비가 내리다.
입직(入直)했다. 담당 당상관(堂上官)이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것 때문에 오후에 직소(直所)를 나왔다. 아침 전부터 또 설사 증세가 있어 입맛이 변하여 아침을 먹지 못했으니 객지에서의 생활이 갈수록 더욱 견디기 힘들다. 식주가(食主家)에서 와서 식대를 달라고 하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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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23일
| 哲宗10
| 己未
이른 아침 창문을 열어 보니 안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성내(城內)에 가득 퍼져 <지명>남산(南山)지명> <지명>잠두봉(蠶頭峰)지명>의 형체가 희미했다. 곧바로 창을 닫고 적막히 앉았다. 할 일 없는 것이 괴로워 책을 펴서 열람하고자 했지만 창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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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6월 25일
| 哲宗10
| 己未
들으니 <지명>동래(東萊)지명>의 수상한 선박이 돌아 갈 때 면(面)의 <인명>아탐곡(阿呑谷)인명>놈이 행상으로 동래부에 가서 동래 사람 여럿이 그 배에 올라타고 갔다고 하여 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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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7월 3일
| 哲宗10
| 己未
| 비 조짐이 개지 않다. 훈증을 견디기 어렵다.
<인명>용흠(龍欽)인명>이 또 <지명>하상(河上)지명>에서 <지명>지곡(枝谷)지명>을 거쳐 찾아왔다. 두 곳의 말을 전했지만 그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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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11일
| 哲宗10
| 己未
| 맑다.
이른 아침 입직(入直)했다. 족질(族姪) <인명>문흠(文欽)인명>을 광화문(光化門) 밖에서 보내니 서운하고 암담한 회포가 없지 않다. 동료 <인명>정기덕(鄭基德)인명>이 회동 대신(會洞大臣)이 복을 누리는 이유에 대해 말하길, "대신(大臣)의 친산(親山)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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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19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구름 끼고 흐리다.
이른 아침 가마를 타고 <지명>장동(長洞)지명>으로 가서 이 태(李台) 집안의 상(喪)에 조문을 했다. 금관복(金冠服)의 여러 피복 건들에 관해 물으니 홍상(紅裳), 홍삼(紅衫), 후수(後繡), 제구(祭屨) 4건(件)이 부족하여 부득이하게 <지명>이현(泥峴)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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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29일
| 哲宗10
| 己未
| 날씨가 또 전날과 같다.
오늘은 곧 존숭(尊崇)하는 첫 번째 습의(習儀) 날이고, 또 각양의 의장(儀仗)을 받들고 여러 당상관(堂上官), 낭관(郎官)들이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나는 아침 전에 설사로 혼절하여 인사불성 상태였다. <인명>영직(英直)인명> 놈을 시켜 붕어[鮒魚]와 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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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14일
| 哲宗10
| 己未
입직(入直)했다. 말의 병이 시종 차도가 없고 등의 피부가 썩어 뼈가 나와 폐사할 지경이니 거듭 공고(公故)를 매일 알려오니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이달 20일 이후 연달아 습의(習儀) 일정도 있으니 시름겹고 고민됨을 어찌 다 말로 하겠는가? 아침 전에 승선(承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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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22일
| 哲宗10
| 己未
| 종일 구름 끼고 흐리다.
종일 구름 끼고 흐린 것이 흑기(黑氣)와 같았기에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지명>한양지명>에 입성한 이후 어제 밤에야 비로소 편안히 잤다. 정랑(正郞) <인명>정창휴(鄭昌休)인명>가 숙소로 찾아왔으니 적막하던 가운데 그의 뜻이 진실로 감사하다. <인명>영직(英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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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6월 24일
| 哲宗10
| 己未
아침에 들으니 <지명>병곡(屛谷)지명> <인명>권남대(權南坮)인명> 공이 첩(帖)을 내려 주시어 당내(堂內) 너덧 명이 함께 따라가다가 돌아왔다. 다행히 종일 미풍이 불어 무더워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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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7월 2일
| 哲宗10
| 己未
| 큰 비가 오고 우레가 치다.
<지명>하상(河上)지명> 척질(戚姪) <인명>류순형(柳舜亨)인명>이 더위를 무릅쓰고 내방했다. 들으니 사계(査契) <인명>명가(明可)인명>가 6월 도목정사에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다고 했다. 이른 아침 채 아(蔡兒)를 보내 축하했으나 갑자기 큰 비를 만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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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25일
| 哲宗10
| 己未
| 아침에 구름 끼고 흐리다.
숙소에서 <지명>북청(北靑)지명>의 의원(醫員) <인명>전희영(全喜永)인명>을 만났는데 그의 자(字)는 사심(士心)이고 홍 상사(洪上舍)를 따라 온 것이다. 그 사람은 의술이 사뭇 정밀하다고 하기에 내가 소변을 자주 보고 잠을 못 이루는 병을 물었다. 혹 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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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9월 17일
| 哲宗10
| 己未
| 서리가 내리다.
새벽에 도감소(都監所)에 들어가니 모든 당상관(堂上官)과 낭관(郎官)들이 일시에 모이기를 마쳤다. 공조(工曹)의 대청(大廳)에서 봉과례(封裹禮)를 행하였는데, 처음 손시(巽時)로 정하여 봉과한 후에 해를 보니 거의 오시(午時)가 되었다. 동이 틀 새벽 무렵 비록 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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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6월 19일
| 哲宗10
| 己未
| 비가 내리다가 오후에 개다.
<지명>원촌(遠村)지명> 진사(進士) 이 주서(李注書) 형제가 왔는데 과거 후에 서완(西阮)의 상(喪) 때문에 유과(遊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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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6월 27일
| 哲宗10
| 己未
계아(季兒)가 <지명>전고(前皐)지명>에 간 것은 말갈기를 사기 위함이었다. <지명>신평(新坪)지명> 족군(族君)이 부(府)로 가 그 가는 길에 여러 가지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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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7월 5일
| 哲宗10
| 己未
| 구름 끼고 흐리다가 때때로 가는 비가 오다.
해가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오는 듯했다. 그 열기가 화로 같았다. 시절로 생각해보면 가능했지만 난감함이 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