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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4월 9일
| 哲宗4
| 癸丑
| 가랑비가 내리다.
<인명>강서영(姜胥永)인명>, <인명>김석유(金奭裕)인명>가 각각 급한 일로 먼저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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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4월 17일
| 哲宗4
| 癸丑
<인명>충재(沖齋) 권선생(權先生)[권벌(權撥)]인명>을 승무(陞廡)하는 일로 세 도(道)가 합소(合疏)하는 것을 의논하려고 양현고(養賢庫) 대청에 자리를 만들고 각 도(道)에 문서를 보내고 때에 맞추어 규혼(叫閽)하는 일을 행하니, 반중(泮中)에 있는 영남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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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4월 25일
| 哲宗4
| 癸丑
새벽에 <지명>학교(學橋)지명>로 가서 유산(酉山)이 있는 곳을 방문하니 전날 어디로 나가서 아직도 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기려점(沂旅店)에서 쉬면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오후에 비로소 만나 대화를 나누고 반촌(泮村)으로 들어오니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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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4월 9일
| 哲宗8
| 丁巳
| 종일 비가 쏟아 붓듯이 내리다.
정시(廷試)에 나아갔으나 종일토록 비가 쏟아 붓듯이 내려 어떻게 답지를 제출했는지 모르겠다. 오늘부터 16일까지 비가 틈 없이 내리니 평지가 강이 되어 과거보는 유생의 행색을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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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8월 17일
| 哲宗8
| 丁巳
듣자하니 <지명>영천(榮川)지명> 송림원(松林院) 선조비(先祖妣) 묘 뒤, 보이지 않는 땅에 투매(偸埋)한 변고가 있어 저녁에 <지명>포산(苞山)지명> 신주와 식솔들이 모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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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1일
| 哲宗 11
| 庚申
| 구름 끼고 흐리다.
목 아(木兒)가 처가로 갔으니, 대개 신례(新禮)를 이달 22일로 통지해서이다. 계단 위의 모란 떨기를 나누었으니, 이달이 소춘(小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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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9일
| 哲宗 11
| 庚申
|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리다. 낮에 또 비가 내리다.
아이들이 <지명>장려동(長麗洞)지명> 절사(節祀)에 가서 참석하고 저물녘이 되어 옷이 젖은 채 돌아왔다. <인명>이 홍주(李洪州)[이휘재(李彙載)]인명>가 그의 외손 윤아(輪兒)를 데리고 오늘 낮에 <지명>선성(宣城)지명>으로 출발했는데 잠시 뒤에 또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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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3월 22일
| 哲宗4
| 癸丑
| 아침에 흐리고 저녁에 비오다.
유생을 보내어 다시 동의를 청했다. 장의(掌議)은 줄곧 스스로 주도할 수 없다는 뜻으로 떠넘기니 여러 가지로 고민스러웠다. ○ 정언(正言) <인명>김석희(金錫熙)인명>가 문안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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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3월 30일
| 哲宗4
| 癸丑
| 맑다.
소색(疏色) <인명>강서영(姜胥永)인명>이 늦게 왔다. 유학(幼學) <인명>강직(姜稷)인명>은 소임 때문에 가지 못한다는 뜻을 소청에 편지를 보내왔다. 아울러 공론을 넓히고 대사를 돈독히 하는 뜻을 전해왔다. 또 구래로 이 일로 (만들어진) 여러 차례의 상소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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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4월 8일
| 哲宗4
| 癸丑
| 흐리다.
소수(疏首) 장(丈)이 때에 따라 합당하게 요량하겠다는 뜻으로 <지명>대평(大坪)지명>, <지명>소호(蘇湖)지명>의 편지에 답했다. ○ 도성(都城)에 등을 걸어 야경이 찬란하여 관원들이 잠시 구경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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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4월 16일
| 哲宗4
| 癸丑
| 큰바람이 불고 매우 쌀쌀하다.
종일토록 폐문하고 시름하며 앉아 서로 돌아보며 있으니 고민스럽다. 도사(都事) <인명>이만익(李晩翊)인명>이 와서 짧은 시간 함께하니 또한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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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4월 24일
| 哲宗4
| 癸丑
해가 저문 뒤에 두릉(斗淩) <인명>정유산(丁酉山)[정학연(丁學淵)]인명>이 들어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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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3월 26일
| 哲宗8
| 丁巳
중아(仲兒)와 계아(季兒)가 정과(廷科)에 나아가는 것을 전송했으나 수일 동안 빗물이 넘치고 먼 길을 가고 건널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얕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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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8월 16일
| 哲宗8
| 丁巳
부내(府內)의 곡반에 입참하여 돌아오는 길에 사교(四郊)에 곡식들이 여물고 오곡이 무성하여 우국(憂國)의 바람이 족히 위로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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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9월 30일
| 哲宗 11
| 庚申
| 날씨가 조금 풀리다.
신평 족군(新坪族君)의 행차를 <인명>금우(金牛)인명>에게 들으니, 이달 23일에 그와 함께 출발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소식이 없으니, 분명히 도중에 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근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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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8일
| 哲宗 11
| 庚申
<인명>이 홍주(李洪州)[이휘재(李彙載)]인명>와 함께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병파(屛派)와 호파(虎派)가 서로 화합해야 한다는 뜻이 있었으니, 그 말이 매우 좋으나 쉬운 일은 아닐 듯하다. 다만 좋은 뜻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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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16일
| 哲宗 11
| 庚申
| 모질게 춥다.
계아(季兒)가 <지명>응봉(鷹峰)지명> 절사(節祀)에 갔고 <지명>대지(大枝)지명> 경직(京直)놈은 문중일로 <지명>재산(才山)지명>에 가서 백자(柏子)를 사오려 했으나 허탕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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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9월 27일
| 哲宗 11
| 庚申
| 서리가 내리다.
식후에 <인명>금우(金牛)인명>가 내려갔다. 듣건대, <인명>우 아(宇兒)[김우흠(金宇欽)]인명>가 편안하다고 하니 위로되고, 시장(諡狀)도 등사(謄寫)하여 온다고 하니 다행이다. 임금이 신문내(新門內) 대궐(大闕)로 거처를 옮기는 것을 어제 이미 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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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5일
| 哲宗 11
| 庚申
어제 낮에 듣건대 홍주(洪州) <인명>이휘재(李彙載)인명>가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와서 온 면(面)에 발문(發文)하여 『여지(廬志)』에 관한 일로 회의(會議)를 청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름을 얻어 농단(壟斷)하는 뜻에서 나온 것 같다. 이어서 듣건대, 손녀(孫女)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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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13일
| 哲宗 11
| 庚申
| 아침에 매우 춥다.
목 아(木兒)가 <지명>망천(忘川)지명>에서 비로소 돌아오자 이어서 <지명>우안(愚安)지명> 절사(節祀)에 보냈다. 사급 족질(泗汲族姪)이 폭설(暴泄)을 만나 병을 조섭하게 했다. 두문(斗文) 족인(族人)과 족질(叔姪)이 와서 유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