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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4월 23일
| 哲宗4
| 癸丑
품처(稟處)의 늦고 빠름이 아득하여 일정을 정하기 어렵다. 달을 넘기니 객지의 시름이 심하여 시시각각 고민된다. 남촌(南村)의 물정을 탐문해보니 아직 한마디도 돌아오는 말을 들을 수 없다고 한다. 앞일을 알려고 점을 쳐서 동전을 던져 "곤지비(坤之比)"괘를 얻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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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2월 29일
| 哲宗4
| 癸丑
주서(注書) <인명>이석주(李錫宙)인명>가 문안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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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3월 8일
| 哲宗4
| 癸丑
| 비와 눈이 섞여 내리다. 남은 한기가 매우 매섭다. 포시(哺時)가 되어서 비로소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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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3월 19일
| 哲宗4
| 癸丑
| 가랑비가 오다.
예부터 급문제자 선배들이 찬술한 소(疏)로 대략 더하고 참고하여 다듬어 1본(本)을 만들었다. 또 <지명>대평(大坪)지명> 소본(疏本)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참고할 생각이었다. ○ 초계(抄啓) <인명>이능섭(李能燮)인명>, 석사 <인명>정명화(鄭鳴和)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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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3월 27일
| 哲宗4
| 癸丑
| 맑다.
태학에서 회통(回通)이 왔는데,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보내주신 통문(通文)의 말뜻을 잘 알았습니다. 대산(大山) 이선생의 작위를 추증하고 시호를 청하는 것은 전에 이미 진청(陳請)하여 질(秩)을 추증하고 책을 인출하는 포상이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군자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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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4월 5일
| 哲宗4
| 癸丑
| 맑다. 저녁에 비가내리더니 밤새도록 내렸다.
기다리는 향팽(鄕伻)이 오지 않았다. 장의(掌議) 이하 유생들과 다시 <지명>백동(柏洞)지명> 영파정(暎波亭)에 놀러갔다가 돌아왔다. 연일 이어진 나들이로 객지의 시름이 풀리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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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4월 13일
| 哲宗4
| 癸丑
| 맑다.
<인명>류치임(柳致任)인명>, <인명>김진각(金鎭愨)인명>이 먼저 출발했다. 도사(都事) <인명>유교환(兪敎煥)인명>이 들어와서 종일토록 우의를 다지며 이야기 하고 머물며 묵었는데, 밤이 되어서도 이야기하다가 새벽종이 울리자 달빛 아래 나갔다. 늦게라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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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4월 21일
| 哲宗4
| 癸丑
<인명>류치윤(柳致潤)인명>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오후에 억지로 여러 친구들의 뒤를 따라 반촌(泮村) 뒤를 돌아보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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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1월 6일
| 哲宗8
| 丁巳
가질(家姪)이 <인명>현풍(玄風)인명>의 문안편지를 보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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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6월 5일
| 哲宗8
| 丁巳
곧 조모(祖母)의 기일이다. 또 가서 참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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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3월 24일
| 哲宗4
| 癸丑
| 맑다.
유생을 재(齋)에 들여보내 재(齋)의 여론을 탐문케 했다. 재(齋)에 머물고 있던 진사 <인명>이정실(李廷實)인명>, <인명>이신병(李臣秉)인명>, <인명>홍준학(洪俊學)인명> <인명>이기호(李基鎬)인명>, <인명>이운하(李運河)인명> 등이 연이어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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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4월 2일
| 哲宗4
| 癸丑
| 맑다.
판서(判書) <인명>권대긍(權大肯)인명>이 문안을 왔다. ○ <인명>권응기(權應夔)인명> 또한 입직 중에 서신으로 알려와 <인명>조태순(趙台淳)인명> 신임 도령(都令)과 <인명>한계원(韓啓源)인명>이 정원(政院)에 이어 들어갔으니, 내일 복합(伏閤)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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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4월 10일
| 哲宗4
| 癸丑
| 맑다.
소(疏)를 바치고 돈화문(敦化門)밖에서 일제히 부복하고 태학의 수복(首僕)으로 하여금 정원(政院)에 대개(大槩)를 올리게 했다. 원예(院隸)가 "근실(謹悉)"의 유무를 물어와, 다시 대강을 주어 들여보냈다. 아마도 유소(儒疏)는 당일로 받아들이지 않는 전례가 있어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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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4월 18일
| 哲宗4
| 癸丑
대충 회계(回啓)의 조만(早晩)을 탐문했으나 홍문록(弘文錄) 주천(注薦)등의 일로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했고, 대신들을 차례로 만나보고 난 후에 품처(稟處)한다면 이달 내로 거행하는 것을 예상할 수 없다고 하니 매우 고민스럽다. 진사 <인명>김매수(金邁銖)인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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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4월 26일
| 哲宗4
| 癸丑
오후에 다시 <지명>학교(學橋)지명>로 갔다. 마침 말하는 가운데 묘당(廟堂)에서 품처한 것을 알아보니 응당 오래지 않아 이루어 질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장(丈)의 한번 행차의 힘이 사뭇 적지는 않았다. 황혼 무렵 반촌(泮村)으로 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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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5월 7일
| 哲宗8
| 丁巳
| 밤에 큰비가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지다.
물길이 세차 방천(防川)을 거꾸로 쏟아 붓는 듯 연달아 둑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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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11월 5일
| 哲宗8
| 丁巳
송림원(松林院) 산송(山訟) 때문에 <지명>영천(榮川)지명>에 가서 수일을 머물렀다. 고을 원 <인명>이휘부(李彙溥)인명> 형이 매우 곡진하게 대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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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10월 2일
| 哲宗 11
| 庚申
족질(族姪) 마동 빈(馬洞賓)이 그의 아우 신평 빈(新坪賓)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나에게 <지명>한양지명> 길을 떠난다고 고했으니, 또한 가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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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3월 23일
| 哲宗4
| 癸丑
| 맑다.
소색(疏色) <인명>이만억(李晩億)인명>이 늦게 도착했다. 오래 기다린 나머지 부지불식중에 위로되고 후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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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4월 1일
| 哲宗4
| 癸丑
| 맑다.
명첩 기록을 끝내니, 수천 명이었다. 교리(校理) <인명>권응기(權應夔)인명>가 입직하고 있는 중에 일부러 시국 소식을 알려와 복합(伏閤)하는 일을 논의했다. 대저 도승지(都承旨) <인명>조병기(趙秉夔)인명>가 유고로 정사(呈辭)하였는데, 유소(儒疏)을 받아 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