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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년 2월 29일
| 宣祖34
| 辛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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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11월 21일
| 宣祖33
| 庚子
학관(學官)의 집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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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년 2월 3일
| 宣祖34
| 辛丑
<인명>극술(克述)인명>과 함께 <지명>학암(鶴岩)지명>에서 같이 머물렀다. 향교 사람이 방(榜)을 가지고 왔다. <지명>초계(草溪)지명>의 집에 묵었다. 동북쪽에서 지진이 오랫동안 발생해 지붕의 기와가 심하게 흔들렸고, 쇠붙이 기물들이 모두 쇳소리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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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9월 11일
| 宣祖33
| 庚子
여러 어르신들과 함께 연못에서 물고기를 구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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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12월 25일
| 宣祖33
| 庚子
태수가 서재에 왔다. 저물녘에 술잔을 들고 「군공문(軍功文)」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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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년 3월 1일
| 宣祖34
| 辛丑
| 서리가 내리다.
3일간 연이어 서리가 내려 풀이 마르고 꽃들이 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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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10월 24일
| 宣祖33
| 庚子
듣기에 <인명>박치정(朴致貞)인명> 공이 옥에서 장(杖)을 맞아 운명하였다 하니 아! 슬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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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년 1월 16일
| 宣祖34
| 辛丑
도 군(都君) 과 함께 김 소모(金召募)에게 내려가 <지명>상산(商山)지명>으로 가는 행차를 상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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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12월 20일
| 宣祖33
| 庚子
달빛이 들어와 서재에 낭랑히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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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년 2월 27일
| 宣祖34
| 辛丑
<인명>여일(汝一)인명>의 집에 국화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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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년 2월 26일
| 宣祖34
| 辛丑
여러 아우들을 데리고 싸리문을 만들고 화단을 보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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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11월 3일
| 正祖24
| 庚申
| 또 매우 춥다.
주곡 형주(注谷兄主)가 <지명>금곡(金谷)지명>으로 갔다. 갈전 숙(葛田叔)이 와서 말하기를, "<인명>김 원장(金院長)[김광제(金光濟)]인명>이 죽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라고 했다. 대부(大父)가 "어째서인가?" 라고 하자, "감사(監司)의 애당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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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11월 11일
| 正祖24
| 庚申
| 구름 끼고 흐리다.
부내(府內)의 아전이 감영(監營)의 제음(題音)을 베껴와 고하였는데 대략 이르길, "참으로 공의(公議)가 불민(不敏)하다. <인명>김광제(金光濟)인명>의 흉시(凶詩)에 관한 일로 한밤중에도 잠을 못 이루다가 첩정(牒呈)으로 보고할 무렵에 이르러서야 여러 의론이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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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11월 19일
| 正祖24
| 庚申
| 맑다.
비로소 예를 갖추어 (부친의) 소상(小祥)을 지냈으니 (임금의) 인산(因山) 일이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지명>일직(一直)지명> 남 생원(南生員), <지명>신성(申城)지명> 김 생원(金生員), <지명>갈전(葛田)지명> 안 생원(安生員), <지명>지곡(枝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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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11월 27일
| 正祖24
| 庚申
|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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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12월 5일
| 正祖24
| 庚申
| 아침에 눈발이 흩날리다가 이내 떨어지다. 날씨가 얼마 안 되어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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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2월 7일
| 哲宗4
| 癸丑
조반(朝飯) 후에 향교 문 밖에 자리를 마련하여 조사(曺司)는 <지명>안동(安東)지명> 유학(幼學) <인명>류택흠(柳宅欽)인명>, <지명>의성(義城)지명> 유학(幼學) <인명>이경재(李絅在)인명>, <인명>신석호(申錫祜)인명>, <지명>경주(慶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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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11월 9일
| 正祖24
| 庚申
| 흐리다가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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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11월 17일
| 正祖24
| 庚申
|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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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11월 25일
| 正祖24
| 庚申
| 맑다.
무이 객(武夷客)이 문안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