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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2월 29일
| 庚申
| 맑고 따뜻하다.
하상과 신사동에 하인을 보냈는데 하인이 돌아와서 편지를 보니 모두 편안하다. 어제 읍에서 하인을 보내 어른과 아이가 한결같은 것을 알게 되었고, 우슬(牛膝)을 사 보내어 병든 입에 매우 요긴하다. 교촌에서 소포를 부쳐왔는데 십전탕 두 제를 지어 보내어 쇠약해진 힘을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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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6월 4일
| 辛酉
| 아침에 비가 내리고 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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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3월 20일
| 壬戌
| 맑고 저녁에 흐리다.
오늘은 본 면소의 낙성식 연회가 있는 날이다. 군수와 아계, 그 외 주사들 4명이 두 명의 기녀와 악공을 나오게 하였다. 19개의 면의 면장 혹은 서기들을 초청하자 일제히 도착하여 일대의 풍류라 이를 만 하였다. 우리 마을은 문중의 어른이 성복하기 전이라 참석하지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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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2월 19일
| 乙丑
| 흐리고 춥다. 밤에 비가 쏟아지다가 이내 그치다.
가마를 타고 하상(河上) 외가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백율원(百栗园)에 이르러 외숙부를 뵙다. 성곡(省谷) 장성원(张聲遠) 척(戚)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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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5월 24일
| 癸亥
| 흐리고 서늘하다.
신문을 보니 상해(上海)의 창조파(創造派)가 세력이 없어 윤해(尹海) 등이 러시아 영토〔露領〕로 떠났다고 했다. 자기네들 상호간에도 모순되니, 어찌 단체를 경영하는 일의 방도라 할 수 있겠는가? 탄식하고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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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6월 8일
| 壬戌
| 잠깐 맑았다가 잠깐 흐리다. 밤에 또 비가 조금 내리다.
듣기에 현애․신양․만운․우안․회양은 수해가 더욱 심하여 전답이 도랑이 된 것은 이미 거론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고 심지어 떠내려 간 집도 매우 많다고 하니 이 무슨 재앙의 참혹한 상황이란 말인가? 오직 다행이었던 것은 우리 집의 경우는 비록 사람이 있어서 제방이 터지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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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2월 20일
| 乙丑
| 흐리고 흙비 내리다.
마을과 연정(淵亭)에 인사를 닦다. 미곡(美谷) 어른의 장례에 조문하다. 밤에 낙좌(洛左)의 중상(中祥)에 치전(致奠)드리고 여러 벗과 밤중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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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7월 14일
| 癸亥
| 흐리고 바람 불다. 낮에 또 비가 조금 내리다.
송지(松枝)에 가서 초상을 조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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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3월 22일
| 癸亥
| 맑다. 저녁에 흐리고 빗방울이 몇 차례 떨어지다.
여독으로 인해 쓰러져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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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5월 25일
| 癸亥
| 흐리고 아침부터 비가 내리다. 오후에 이어서 개다. 소서(小暑)의 절기이나 서늘한 바람이 불다.
흐리고 아침부터 비가 내리니 비로소 농사가 크게 가망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오후에 이어서 개어버려서 겨우 밭의 곡식은 구할 수 있었으나 맥답은 점점 늦어만 가니 우려하고 탄식한들 어찌하겠는가? 권기진(權奇晉)이 와서 묵었다. 영아(寧兒)의 편지를 보니 대구(大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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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7월 16일
| 癸亥
| 맑고 뜨겁다.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파주(坡州) 천현면(泉峴面) 가야리(加野里)에 사는 일족인 재덕(在悳)이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불곡산(佛谷山) 산판은 모두 국유지인데 이번에 사정 공시를 했기에 자금 대부(貸付)를 청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신청 시기가 장차 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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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21일
| 癸亥
| 아침에 비가 오고 조금 그치다.
풍산(豊山) 양례에 가서 늦게까지 조문 한 후 말을 타고 몇 리 정도 갔다. 비가 또 와서 옷 젖는 것을 무릅쓰고 잠시 신양하점(新陽下店)에서 쉬었는데, 비가 그치지 않기에 부득이하게 다시 출발했다. 만운(晩雲)의 송(宋) 아사(雅士)의 집에 이르러 오랫동안 휴식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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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2월 27일
| 庚申
| 맑고 춥다.
오늘은 입춘이다. 신수를 점쳐서 절괘가 태괘로 변하는 괘를 얻다. 춘축을 써서 각 문에 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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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6월 2일
| 辛酉
| 비가 하루 종일 쏟아지다.
답맥이 산에 있어 필경 싹이 올라왔을 것인데 근심스럽고 근심스럽다. 아직 심지 않은 여러 집에서는 이제야 비로소 흡족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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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3월 18일
| 壬戌
| 맑고 따뜻하다.
오늘 불곡산(佛谷山)에 가토(加土)하는 것은 아중의 어진 노력이다. 지곡(枝谷) 족조가 세상을 버리니 큰 덕이 다 되었으니 슬프고 탄식됨이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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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6월 13일
| 壬戌
| 맑고 뜨겁다.
봉현면(鳯峴面) 하촌(下村)의 이교성(李教成) 형이 어제 예천 시장 편으로 비로소 말린 더덕 150개를 부쳐 보냈고, 가격은 2원 40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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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3월 3일
| 癸亥
| 아침에 비가 내리고 조금 개다. 밤에 비가 내리고 그치지 않았다.
명원(明遠) 척(戚)이 이틀간 머물다가 떠났다. 우편을 통해 검군(檢君)의 편지를 받았는데, 드러난 탈은 면했고, 월전에 보낸 물건은 잘 받아서 장차 전당(錢塘)에 보낼 것이며, 이달 열흘 상간에 살던 곳으로 돌아 갈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지난달 21일에 보낸 편지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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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17일
| 癸亥
| 맑다.
여러 객들과 더불어 도림(道林)에 가서 알묘(謁廟)하고 점심식사 후 암정(岩亭)에 올랐다. 밤에 시 두 수를 읊었다. 아침저녁으로 음식상은 각각의 집에서 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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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3월 27일
| 癸亥
| 맑다.
후원의 대나무를 베었는데, 지난겨울 눈 속에 묻혀있던 대나무와 감나무가 도처에 모두 그대로 있었다고 했다. 하회(河回)의 학도 백 수십여 생도들이 면으로 순찰하는 것 때문에 잠시 왔다가 돌아서 떠났다. 선재(宣在)와 용하(用夏)는 이 때문에 유숙했다. 아중(阿仲)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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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5월 30일
| 癸亥
| 반은 흐리고 반은 맑다.
하회(河回) 질부가 잘 돌아왔고, 성가(聖可)가 데리고 왔으니 기쁘고 위로되고 기쁘고 위로되었다. 순구(舜九)가 떠나는 편에 전에 왔던 문중 편지에 답장을 써서 보내어 장차 열흘 상간에 우안에서 모이기를 기약했다. 경후(景厚)가 나귀를 타고 예읍(醴邑)으로 갔다가 낙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