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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 5월 28일
| 光海11
| 己未
<인명>홍우성(洪禹成)인명>이 배우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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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 7월 27일
| 光海11
| 己未
<인명>박덕명(朴德明)인명>의 아내가 역병으로 죽었다. 지아비는 북쪽에서 수자리 살고 아내는 남쪽에서 죽었으니, 죽은 자는 그만이거니와 산 자는 어찌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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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 8월 20일
| 光海11
| 己未
「분자필연부(焚子筆硯賦)」와 「의당천태도사사마승정사방환산표(擬唐天台道士司馬承禎謝放還山表)」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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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 10월 12일
| 光海11
| 己未
노 생(魯生)을 시켜 박 상사(朴上舍)의 만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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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 11월 22일
| 光海11
| 己未
<지명>신안(新安)지명>에서 무과(武科)가 열렸는데, 널리 뽑아서 정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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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1월 18일
| 光海12
| 庚申
별감(別監) <인명>최몽진(崔夢震)인명>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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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3월 16일
| 光海12
| 庚申
<지명>학암(鶴巖)지명>에 올라가 종사관(從事官)이 진휼하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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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 12월 13일
| 光海11
| 己未
<인명>권학(權學)인명> 어른을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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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2월 6일
| 光海12
| 庚申
눈이 녹지 않아서 문밖을 나갈 수 없으니, 완연히 <지명>낙양(洛陽)지명>의 <인명>원안(袁安)인명>처럼 가만히 누워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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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1월 10일
| 光海14
| 壬戌
【이전의 기록은 결락되어 있다.】듣건대, <인명>노추(奴酋)[누르하치(努爾哈赤)]인명>가 <지명>용천(龍川)지명>으로 퇴각하여 주둔하고 있다고 한다.【이후는 10일 이후 기사다.】 <지명>백산(柏山)지명>으로 나왔다. <인명>견여(堅如)[김견여(金堅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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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3월 8일
| 光海14
| 壬戌
송대(松臺)를 축조하는 날에 오래된 복숭아나무가 중간에 있어서 다시 자라지 않게 그것을 뽑아 버렸다. 다시 열흘 후에 그것을 보니 꽃과 잎이 다 피었으니 다른 복숭아나무와 다르지 않았다. 그 버려진 나무가 이와 같이 본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가련히 여겨 동자(僮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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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4월 12일
| 光海14
| 壬戌
<지명>삼가(三嘉)지명>의 송 씨(宋氏)를 조문하고, 북쪽 변방에서 돌아온 <인명>이선보(李善甫)인명>를 위로하였다. 야옹정(野翁亭)으로 내려가 <인명>질중(質仲)인명> 형을 만나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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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2월 21일
| 光海14
| 壬戌
<지명>현풍(玄風)지명>의 유생 <인명>김득휘(金得暉)인명> 무리 5~6인이 과거(科擧)를 연기하지 않았기에 19일 말을 타고 달려 <지명>도현(陶峴)지명>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는데, 심하도다. 공명(功名)이 분주한 선비들이여! 작은 일에 이러하니, 하물며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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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4월 5일
| 光海14
| 壬戌
박 장령(朴掌令)이 논박을 당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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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5월 11일
| 光海14
| 壬戌
첨지(僉知)가 먼저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掌儀先文久不來" 내가 이어서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先行典穀坐蓮臺" 문 군(文君)이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豆腐己上山篁串" 내가 이어서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乖敗文君口欲開" 서로 함께 포복절도할 때에 먼저 <인명>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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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6월 21일
| 光海14
| 壬戌
향교의 노(奴)가 회문(回文)을 가지고 왔는데 윤 씨(尹氏)의 갈문으로 <지명>송천(松川)지명>에 간 일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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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7월 4일
| 光海14
| 壬戌
| 비가 뿌리다.
배 위에 누워 있었다. 첨지(僉知)가 작은 배를 타고 포구로 들어가 새로 경작하는 전답을 살펴보았다. ‘횡(橫)’자를 얻어 첨지(僉知)에게 다시 시를 지어 올렸는데 다음과 같다. "食披蘆葦宿依汀, 行李蕭然短棹輕. 江接龍堂秋氣早, 山連馬院夕陽明. 落霞孤鶩王公句, 後樂先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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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2월 16일
| 光海14
| 壬戌
좌수 <인명>김협(金鋏)인명>이 이른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 아! 슬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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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3월 28일
| 光海14
| 壬戌
시냇가에 해당화를 심고, 채마밭에 해바라기를 옮겨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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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 5월 5일
| 光海14
| 壬戌
아침에 찰방 <인명>김이원(金而遠)인명>이 <지명>서울(京)지명>에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