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2년 4월 8일 | 光海4 | 壬子
현풍 현감이 생부(生鮒) 세 묶음을 보냈다.
1612년 6월 26일 | 光海4 | 壬子 | 한밤중에 비가 두어 방울 내리다.
한밤중에 비가 두어 방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웃사람들이 놀라고 기뻐했지만 곧 그쳤으니 하늘의 뜻을 이미 알 만하다. 지금 일찌감치 가뭄이 든 것은 어찌 그 까닭이 없겠는가?
1612년 9월 3일 | 光海4 | 壬子
새로운 관인 <인명>류식(柳植)인명>이 임관하였다고 한다.
1612년 12월 17일 | 光海4 | 壬子
원승(元承) <인명>황경효(黃景孝)인명>가 별세했다고 하니, 슬프고 슬프다.
1614년 3월 7일 | 光海6 | 甲寅
<지명>백산(栢山)지명>으로 나와 <인명>오응남(吳應男)인명>에게서 흰 국화 한 떨기를 얻었다. <인명>견여(堅如)[김견여(金堅如)]인명>의 집에서 백옥매(白玉梅) 한 가지를 캐서 심었다.
1614년 5월 22일 | 光海6 | 甲寅
<인명>박치근(朴致謹)인명>이 찾아왔다.
1614년 7월 4일 | 光海6 | 甲寅
수령이 갑절로 논박을 당하였다.
1614년 8월 21일 | 光海6 | 甲寅
<지명>선산(善山)지명>에 시험을 치르러갔다.
1614년 11월 1일 | 光海6 | 甲寅
<인명>박집중(朴集仲)인명>이 초계소회(草溪疏會)에 가는데, 병장(病狀)을 부쳤다.
1615년 2월 8일 | 光海7 | 乙卯
<지명>송오(松塢)지명> 앞에 해당화를 심었다.
1615년 3월 12일 | 光海7 | 乙卯
아우 <인명>무(武)인명>와 <인명>견여(堅如)[김견여(金堅如)]인명>가 관청에 갔는데 서재(書齋)에 관해 정서(呈書)한 일 때문이다. <지명>원당동(元堂洞)지명>에 올라가 철쭉 한 떨기를 캐어 <지명>송오(松塢)지명> 남쪽 화단 가 해당화 사이에 심었다
1612년 5월 18일 | 光海4 | 壬子
<인명>신준(申濬)인명>이 <인명>김자첨(金子瞻)인명>의 서사(書辭) 때문에 와서 묵었다.
1612년 7월 6일 | 光海4 | 壬子
<지명>냉천(冷泉)지명>에 목욕을 하러갔는데 따라간 자는 아우 <인명>무(武)인명>와 일족 <인명>찬(纘)인명>이었고, 함께한 자는 <인명>견여(堅如)[김견여(金堅如)]인명> 일가와 <인명>배현민(裴玄敏)인명>이었으며, 그것을 본 자는 한 봉사(韓奉事
1612년 10월 19일 | 光海4 | 壬子
<인명>노여일(魯汝一)인명> ․ 김 참봉(金參奉) 부자 ․ <인명>김덕형(金德瀅)인명> ․ <인명>노여관(魯汝寬)인명>이 찾아왔다.
1614년 1월 6일 | 光海6 | 甲寅
「태수선정서(太守善政書)」를 지었다.
1614년 4월 3일 | 光海6 | 甲寅
남교(南郊)로 나가 농사짓는 것을 보았다.
1614년 5월 30일 | 光海6 | 甲寅
선전관(宣傳官) 류씨(柳氏) 형제가 편지와 절구(絶句)를 보내서 곧바로 답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白屋堂中鶴髮年, 寒灰朝暮手能燃. 三牲宿志終無用, 只怨干戈不怨天." 또 답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東波之速與流年, 百草纔黃花復燃. 歲月無情猶若此, 只將窮達任皇天."
1614년 8월 9일 | 光海6 | 甲寅
「모수천하비(皃瘦天下肥)」시를 지었다.
1614년 9월 4일 | 光海6 | 甲寅
<인명>김 철원(金鐵原)인명>이 8월 보름에 별세했다고 하니, 아! 슬프도다.
1614년 11월 24일 | 光海6 | 甲寅
새로 온 수령 <인명>신경문(申景汶)인명>이 부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