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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8월 19일
| 哲宗 3
| 壬子
8월 19일
市店에 있던 여러 사람은 노소를 막론하고 무릎을 맞대고 앉아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리고 새벽이 가까워진 후에야 인근의 사람들이 차츰 모여들어 到記에 기록된 사람의 수가 170여 명이었다. 식사 후에 <관청명>경주부(本府)관청명>로 들어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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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6월 1일
| 哲宗 3
| 壬子
6월 1일
향례를 드리고 또 이전과 같이 모임을 가졌다. 아침과 저녁의 식사 제공은 문중에서 마련해서 보내온 쌀과 반찬거리를 서원 마을에서 다소 넓은 집에 갖추어 나누어주었다. 新儒로 서원에 들어온 사람은 또한 수십 명이었는데, 식사를 서원에서 제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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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8월 1일
| 哲宗 4
| 癸丑
8월 1일
香禮를 드린 후 刊任이 院長에게 안부를 여쭈었다. 이것은 대개 서원의 체면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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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1월 17일
| 哲宗 4
| 癸丑
1월 17일
고을에서 訴狀을 올린 후에 관청에서 내린 帖文이 있었다. 관청에서 서원으로 將吏를 내어보내 經閣의 문단속으로 봉하여 표시하였다. 그리고 열쇠를 샅샅이 뒤져 찾은 후에 <인명>李眞銓인명>을 관청의 뜰로 잡아 올려 보내니, 엄히 처벌하고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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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1월 16일
| 哲宗 4
| 癸丑
1월 16일
<관청명>監營관청명>에 訴狀을 올렸다. 또 士林의 文報도 올렸다. 이날 <인명>孫世麟인명>과 <인명>孫時夏인명>, 그리고 <인명>鄭涬一인명>에게 모두 정강이를 때리며 한 차례 캐어물은 후에 <인명>鄭涬一인명>은 칼을 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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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2월 9일
| 哲宗 4
| 癸丑
| 바람
2월 9일
바람
典祀官에게 행장을 차려 길을 떠나보냈다. 刊任이 집에 있으면서 지극히 걱정하며 單子를 올렸는데, 저쪽 편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것이 풍문으로는 秋享 때보다 더 심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집안사람들이 모여 의논하고, 각처에 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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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2월 10일
| 哲宗 4
| 癸丑
| 따뜻함
2월 10일
따뜻함
참석할 齋任과 여러 儒生들이 일제히 서원에 올라왔다. 官家의 행차에서 私通이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듣기로 저 무리들 중에 <인명>李綺壽인명>와 <인명>李眞慣인명>이 府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큰 변괴로 극히 난처한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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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2월 6일
| 哲宗 4
| 癸丑
2월 6일
儒生 한 사람을 정하여 望記의 종이를 봉하여 올렸다. 官家의 뜻이 비록 기꺼이 승낙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또한 사림의 公議를 도외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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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8월 23일
| 哲宗 3
| 壬子
| 맑음
8월 23일
맑음
서원의 하인을 내려오게 하여 院長의 행차에 딸려 보내 指令을 받아 일족에게 말하고, 뒤를 따르며 世德祠까지 호위하게 하였다. 또한 변고 후에 대해 올릴 글을 지어 <관청명>경주부(本府)관청명>에 나이 어린 15명을 보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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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8월 18일
| 哲宗 3
| 壬子
| 맑음
8월 18일
맑음
재계할 유생들이 儒巾과 儒服을 갖추고 엄숙히 앉았는데 新儒 가운데 섞여 들어온 사람이 또한 10여 명에 이르렀다. 官卒이 傳令을 가지고 사당 앞에서 "新儒는 일제히 함께 나가라. 비록 舊儒라고 하더라도 齋戒에 참여하는 사람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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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6월 21일
| 哲宗 3
| 壬子
<지명>龍仁지명>의 <건물명>忠烈書院건물명> 士林에서 <지명>永川지명>의 <건물명>臨皐書院건물명>에 답하는 通文
귀하들의 고을에 있는 <건물명>臨皐書院건물명>은 바로 우리 老先生의 고향에 맨 먼저 창건된 서원이고, 저희들 고을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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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8월 24일
| 哲宗 3
| 壬子
8월 24일
<관청명>경주부(本府)관청명>에 들어갔던 儒生이 돌아왔다. 그런데 어제 데려갔던 두 사람과 <인명>孫深遠인명>, <인명>辛天應인명>, <인명>孫龍庄인명>, 그리고 압송해간 7사람을 官廷에 함께 붙잡아다 놓고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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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8월 10일
| 哲宗 4
| 癸丑
8월 10일
<관청명>監營관청명>의 판결문이 도착하여 즉시 <관청명>경주부(府)관청명>에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서원의 儒生인 <인명>李在璜인명>을 비롯한 <인명>李能完인명>, <인명>李憙久인명> 등이 <관청명>경주부(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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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1월 21일
| 哲宗 4
| 癸丑
1월 21일
관청에서 禮吏를 정하여 열쇠를 싸서 보내왔다. 또한 帖文을 내렸다. 회원들이 모임을 파하고 각자 돌아갈 쯤에 <지명>廣北지명>의 鄕員이 모임에 참석하였기에 몇 글자 안 되게 통문을 발행하여 두루 알렸다.
<건물명>玉山書院건물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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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8월 21일
| 哲宗 3
| 壬子
| 맑음
8월 21일
맑음
오후에 <건물명>景山書堂건물명>에 모였는데, 院長은 이미 와있었다. 한나절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비를 만나 <지명>新洞지명>에서 묵었다. 이바지하는 음식이 담백하여 그 맛이 또한 하나의 멋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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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11월 24일
| 哲宗 3
| 壬子
서원의 儒生인 幼學 <인명>李述祥인명>을 비롯해 <인명>崔世應인명>, <인명>權致福인명> 등이 府에 올린 訴狀[11월 24일, (府尹) <인명>金穰根인명>]
삼가 생각건대, <건물명>玉山書院건물명>는 바로 文元公 晦齋 <인명>李彦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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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3월 19일
| 哲宗 10
| 己未
<연도>1859(己未)연도>年 3월 19일
서원의 儒生들을 시험으로 뽑아 추천한 후 <건물명>溪亭건물명>에서 <관청명>경주부(本府)관청명>에 올린 訴狀에 대한 판결문[訴狀의 원본은 보지 못했으며, <건물명>경주부(本府)건물명>의 府尹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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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5월 15일
| 哲宗 4
| 癸丑
5월 15일
香禮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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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6월 13일
| 哲宗 3
| 壬子
<건물명>忠烈書院건물명> 사림이 (<건물명>臨皐書院건물명>) 院長에게 아뢰는 條目
[<연도>壬子(1852)연도>年 6월 13일]
삼가 생각건대, <지명>永川지명>의 <건물명>臨皐書院건물명>은 바로 우리 老先生의 고향에서 맨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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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8월 25일
| 哲宗 3
| 壬子
| 맑음
8월 25일
맑음
<관청명>監營관청명>에 올릴 訴狀을 가져갈 儒生 1명을 떠나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