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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26일
| 정조12
| 무신
11월 26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壽峯과 安平의 편지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도착했다. <건물명>刑曹判書건물명> <인명>尹蓍東인명>이 상소를 하여 趙<관직명>承旨관직명>를 복직시킨 일에 대해 극단적인 말을 하며 침해하고 배척하기에 여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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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6월 15일
| 정조12
| 무신
6월 15일 黃<관직명>監察관직명>가 茶禮를 행하고서 제사를 지내고 거둔 음식을 싸서 보내고, 얼마 뒤에 또 스스로 오니, 두텁게 생각해 주는 마음이 감사할 따름이다. 오후에 <인명>趙奎鎭인명>와 <인명>黃聖休인명>가 <지명>大廟洞지명>에 사는 <관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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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4일
| 정조12
| 무신
11월 4일 또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으나, 승정원에서는 이전과 같이 되돌려 보냈다. 오후에도 또한 이와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소문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 <인명>李敏采인명>가 <관직명>同副承旨관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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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4일
| 정조12
| 무신
10월 4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掌議 <인명>柳鳳祚인명>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다. 이때는 상소의 실무진들이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두 사람만이 있었다.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는 한마디 말도 없이 되돌려 보냈다. 정오를 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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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8일
| 정조12
| 무신
7월 8일 黃<관직명>監察관직명>이 상소문의 초안을 지었다. <인명>黃聖休인명>와 <인명>趙奎鎭인명>가 그 초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상소문에서 배향 인물 중 단지 元位만 거론한다면 끝내 온당치 못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이에 대해 黃<관직명>監察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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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21일
| 정조12
| 무신
10월 21일 또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대답하는 것이 전날과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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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21일
| 정조12
| 무신
11월 21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인명>鄭得魯인명>와 <인명>曹亨道인명>가 <지명>黃州지명>에서부터 찾아왔다. 疏首와 <인명>鄭得魯인명>가 廟洞의 <인명>李獻慶인명> 어르신을 찾아갔다가, 이어서 苧洞으로 <인명>兪恒桂인명> 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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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5일
| 정조12
| 무신
7월 5일 <지명>서울지명>에 거주하는 <인명>李明謙인명>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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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26일
| 정조12
| 무신
7월 26일 <인명>黃瑗인명>와 <인명>黃道源인명>가 와서 상소문의 사본을 살펴보고 곧 돌아갔다. 疏首와 <인명>黃聖休인명>가 손수 상소문의 초본을 가지고 <지명>美洞지명>의 蔡政丞에게 갔다. 그러나 기운이 평안하지 않아 문지기가 명함을 받아들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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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8월 20일
| 哲宗 4
| 癸丑
8월 20일
宗堂에서 문중의 모임을 크게 열었다. 한나절 동안 충분히 토의를 하여 首執事 중 한 자리를 너그럽게 끼워 넣어주기로 결정하였다. 會中에서 구계서원에 牌旨를 보내 반드시 그믐 전에 鄕會의 날짜를 정하고, 고을 안의 각 집안에 통고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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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12일
| 정조12
| 무신
7월 12일 <지명>서울지명>에 거주하는 李儒珍이 찾아왔다. 正字 <인명>孫會慶인명>가 壽峰과 瀰川에서의 편지는 보내왔는데, 유독 葛田의 편지를 보지 못했다. 다만 <인명>趙雲慶인명>에게 근심스럽다는 통지만 이르렀다. 그것은 아마도 인편에 급하고 당황한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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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6월 11일
| 정조12
| 무신
6월 11일 <인명>黃聖休인명>와 <인명>趙奎鎭인명>가 <관직명>監察관직명> <인명>黃瑗인명>를 방문하여 상소에 대한 일을 의논했다. <관직명>長鬐縣監관직명> <인명>黃翼振인명>가 또한 와서 자리를 함께했다. 楊根에 사는 黃星源이 방문했다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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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2일
| 정조12
| 무신
11월 2일 疏首와 掌議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는 이전과 같이 되돌려 보냈다. 오후에도 또한 이와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소문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관직명>都事관직명> <인명>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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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6월 7일
| 정조12
| 무신
6월 7일 斯文 <인명>趙奎鎭인명>가 이전에 앓던 눈병이 갑자기 심해져서 약을 지어주었으나 효험이 없었다. <인명>黃聖休인명>의 설사 증세가 또 갑자기 발발하여 생강차와 六一散 등의 물건을 섰다. 城에 들어간 후에 일행 중에 늙은이와 젊은이가 연이어 병을 일으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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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2일
| 정조12
| 무신
10월 2일 임금의 수레가 통행금지의 해제를 알리는 종이 울린 후 宗廟로 행행하여 이날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倡義錄을 위한 상소의 실무진인 <인명>權檾인명>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명>서울지명>의 유생 두 사람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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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9월 1일
| 哲宗 4
| 癸丑
9월 1일
香禮를 드리는데, 士林에서 거행하였다. 식사 후에 비에 막혀 계속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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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8월 16일
| 哲宗 3
| 壬子
| 맑음
8월 16일
맑음
어른과 젊은이들이 모두 모인 후에 자리를 함께하여 다음과 같이 의논을 수렴하였다."이번 大祭는 여느 때와는 다릅니다. 齋戒에 참여하는 儒生 이외에 鄕儒와 本孫은 물론 서원에서 음식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뜻을 글로 써서 서원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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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18일
| 정조12
| 무신
10월 18일 疏首와 掌議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다. 오전과 오후에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 대답하는 것이 전날과 똑같아 상소문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인명>金相寬인명>을 비롯해 <인명>李宗洛인명>, <인명>鄭基煥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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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6일
| 정조12
| 무신
11월 6일 임금의 수레가 궁궐로 돌아왔다. 疏首 <인명>趙奎鎭인명>와 掌議 <인명>柳鳳祚인명>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 일이 많다는 이유로 되돌려 보냈다.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 창의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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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6일
| 정조12
| 무신
7월 6일 東宮에서 禫事를 지내러 가는 大駕가 寅時에 幸新門 안의 대궐을 지난다기에 바삐 鍾街로 나갔더니 御駕가 이미 지나가 버렸다. 그래서 임금님의 얼굴을 직접 뵐 수 없어서 참으로 한탄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