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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3월 1일
| 정조13
| 기유
3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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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14일
| 정조12
| 무신
11월 14일 또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으나, 승정원에서 하는 대답은 다시 전날과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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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8월 12일
| 정조12
| 무신
8월 12일 國忌의 제삿날이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인명>趙錫簡인명>가 찾아오고, <인명>成殷柱인명>는 비에 막혀 계속 머물러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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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2월 14일
| 정조12
| 무신
12월 14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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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9일
| 정조12
| 무신
7월 9일 太學이 아직도 질서가 잡히지 않았다. 그 사이 경비가 적지 않았는데 한 가지 일도 실마리를 찾지 못했으니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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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22일
| 정조12
| 무신
10월 22일 또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으나 승정원의 대답은 전날과 같았다. <인명>全始玉인명>이 찾아와서 正位와 配位를 상소문에 합하여 넣는 일에 대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많이 말했으나, <지명>서울지명>의 의견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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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12일
| 정조12
| 무신
11월 12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 <인명>趙奎鎭인명>와 掌議 <인명>柳鳳祚인명>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 한마디 말도 없이 되돌려 보냈다. 이와 같은 것을 세 번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승정원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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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6월 8일
| 정조12
| 무신
6월 8일 <인명>黃聖休인명>와 <인명>趙奎鎭인명>의 설사 증세가 평상시와 같이 회복되어 다행이었다. 아침에 貞台를 만나 상소에 있어서 여러 절차를 대략적으로 펼쳐보였다.貞台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힘이 미치는 것이라면 감히 감사하며 관여하지 않겠습니까? 斯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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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19일
| 정조12
| 무신
10월 19일 疏首와 掌議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했다. <관직명>景慕宮令관직명> <인명>姜世鷹인명>이 맞아들여서 안부를 물었다. <인명>鄭得魯인명>와 <인명>曹亨道인명>가 길을 떠났다.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내고자 했으나 문을 지키는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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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3일
| 정조12
| 무신
10월 3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관직명>同副令公관직명> <인명>李敏普인명>가 사직하여 들이지 않고 바로 되돌려 보냈다. 정오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린 후에 한 大臣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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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7일
| 정조12
| 무신
7월 7일 <인명>李宗洛인명>와 <인명>孫潤慶인명>, 그리고 <인명>尹相烈인명>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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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1일
| 정조12
| 무신
11월 1일 疏首와 掌議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는 이전과 같이 되돌려 보냈다. 정오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린 후에도 또한 이와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소문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進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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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20일
| 정조12
| 무신
11월 20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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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19일
| 정조12
| 무신
11월 19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관직명>典籍관직명> <인명>南述魯인명>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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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6월 17일
| 정조12
| 무신
6월 17일 <인명>黃聖休인명>와 <인명>趙奎鎭인명>가 다시 <관직명>右議政관직명>의 집으로 가서 절을 하고 일어나 밖에서 상소의 일에 대해 말했다. 처음에는 승정원의 뜻을 알지 못하고서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우의정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승정원의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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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15일
| 정조12
| 무신
11월 15일 國忌日이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인명>黃弼熙인명>가 倡義錄과 관련해서 조사하고 분변할 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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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8월 13일
| 정조12
| 무신
8월 13일 또 國忌의 제삿날이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관직명>監察관직명> <인명>南基萬인명>와 申<관직명>直講관직명>의 댁에서 제사고기와 편지를 보내왔다. <지명>서울지명>의 유생 두 사람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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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2월 15일
| 정조12
| 무신
12월 15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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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10일
| 정조12
| 무신
7월 10일 <인명>黃聖休인명>를 비롯해 <인명>黃泰熙인명>, <인명>黃夏鎭인명>, <인명>黃弼熙인명>가 翼成公을 배알하기 위해 家廟가 있는 <지명>三浦지명>로 갔다. <인명>趙奎鎭인명>는 <인명>黃道源인명>에게 사례하기 위해 따라갔다가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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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23일
| 정조12
| 무신
10월 23일 또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으나 승정원의 대답은 또한 전날과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