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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16일
| 정조12
| 무신
7월 16일 <지명>반촌지명>에서 <지명>尙州지명>의 倡義錄 책자를 쓰는 일을 비록 마치지는 못했으나, 서원의 일 또한 다잡아 처리해야 할 것이 많았다. 그래서 오후에 <인명>黃聖休인명>와 <인명>趙奎鎭인명>가 <지명>板井지명>의 숙소로 돌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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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23일
| 정조12
| 무신
11월 23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인명>鄭得魯인명>, <인명>曹亨道인명>, <인명>全始玉인명>이 고향에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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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2월 1일
| 정조13
| 기유
2월 1일 <관직명>監察관직명> <인명>黃瑗인명>와 <인명>黃道源인명>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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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2월 29일
| 정조13
| 기유
2월 29일 <인명>黃巖老인명>의 兄弟가 내려간다고 했다. 그래서 <인명>黃弼熙인명>가 고향에 보낼 편지를 써서 부탁했다. 사액의 날짜가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지명>영남지명> 監營에서의 狀文이 갖추어지지 않으니 참으로 괴이하다. <인명>宋思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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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1월 23일
| 정조13
| 기유
1월 23일 아침식사 전에 禮曹에서 임금의 물음에 대답한 것에 대한 批答이 당도했다. 그 批答은 다음과 같았다."翼成公의 院宇에 아직도 扁額이 빠져 있는 것이 어찌 흠이 되는 일 가운데도 흠이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특별히 扁額에 쓸 이름을 지어 바치기를 文任에게 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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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3월 16일
| 정조13
| 기유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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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1월 16일
| 정조13
| 기유
1월 16일 임금의 수레가 新門 안의 대궐로 거동을 했다. 이른 아침에 편지를 써서 <지명>楊州지명>의 <인명>黃夏鎭인명>에게 통지하였다. <관직명>建元陵令관직명> <인명>黃瑗인명>를 비롯해 <지명>서울지명>에 사는 李烜, <지명>楊州지명>의 尹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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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3월 7일
| 정조13
| 기유
3월 7일 <인명>黃弼熙인명>가 禮曹 直房에 갔더니 禮曹 書吏가 임금께 올린 啓聞의 草案을 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禮曹에서 간략히 아룁니다. <관직명>慶尙監司관직명>의 關文에 덧붙여져 도착한 <관직명>尙州牧使관직명>의 보고문에 따르면 서원의 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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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3월 4일
| 정조13
| 기유
3월 4일 <인명>黃弼熙인명>가 禮曹 直房에게 갔는데, 조금 있자니 <지명>영남지명> 監營에서의 關文이 왔다. 關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관직명>慶尙道 觀察使 겸 巡察使관직명>가 상고한 일이다. 관아로부터 禮曹로부터 도착한 關文에 따라 도내 <지명>尙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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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2월 3일
| 정조13
| 기유
2월 3일 아침식사 전에 <인명>黃得中인명>와 <인명>黃秘洙인명>가 찾아왔다. 禮曹 書吏가 올린 글에 대한 題辭와 慶尙監營에서 발행한 關文을 가지고 왔다. <인명>宋思仁인명>가 집안 선조의 일 때문에 왔는데 한 방에 머물게 되어 객지에서의 울적한 마음이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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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2월 13일
| 정조13
| 기유
2월 13일 <인명>黃弼熙인명> 혼자 <지명>서울지명>에 머물게 되자 <지명>泮村지명>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계책을 삼았다. 임금의 수레가 <지명>高陽지명>, <지명>洪州지명>, <지명>坡州지명> 등지로 행차하였다. 수레가 가는 길에 翼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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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1월 29일
| 정조13
| 기유
1월 29일 <지명>坡州지명>의 <인명>黃宅文인명>가 찾아왔다. 아침식사 전에 藝文館 書吏가 서원의 額號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일을 가지고 막 藝文館 堂上의 집으로 가려다가 지나는 길에 와서 보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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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2월 28일
| 정조15
| 신해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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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1월 22일
| 정조13
| 기유
1월 22일 아침식사 전에 禮曹에서 批答에 대한 대답을 고쳐 쓴다는 소문이 들린다고 하였다. 그래서 <인명>黃弼熙인명>가 禮曹直房에 가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禮曹의 書吏가 이렇게 말했다."翼成公의 서원에 賜額을 청하는 批答에 대한 대답에 ‘德業’이라는 두 글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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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3월 15일
| 정조13
| 기유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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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3월 23일
| 정조13
| 기유
3월 23일 ························ 병세가 더욱 심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달라는 上疏를 韓晩裕가 대신 제출하였다. 아침식사 후에 <인명>黃弼熙인명>와 <인명>黃夏鎭인명>가 함께 ························. ··· 令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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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3월 19일
| 정조13
| 기유
3월 19일 <인명>黃道源인명>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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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2월 13일
| 정조12
| 무신
12월 13일 疏首 <인명>趙奎鎭인명>와 掌議 <인명>柳鳳祚인명>, 그리고 <인명>黃聖休인명>가 <관직명>承旨관직명> <인명>洪仁浩인명>의 집으로 찾아가 상소문을 받아들여달라는 뜻을 간곡히 청했다. <인명>洪仁浩인명>가 이렇게 말했다."막 승정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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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1월 14일
| 정조13
| 기유
1월 14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 <인명>趙奎鎭인명>와 掌議 <인명>柳鳳祚인명>, 그리고 <인명>黃弼熙인명>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했다. 그런데 보름에 각 陵廟의 향과 제문을 받는 일로 아침이 다 지나도록 몹시 번거롭고 바빴다. 조금 안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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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1월 25일
| 정조13
| 기유
1월 25일 疏首와 <인명>黃聖休인명>가 藝文館 堂上 <인명>李秉模인명>를 찾아가 만나 賜額으로 세 가지 바라는 單子[玉洞, 德峯, 道溪]를 써서 올렸다. 이에 대해 藝文館 堂上이 이렇게 말했다."藝文館의 아랫사람이 일찍이 (이렇게 額號를 써서 올리는) 規例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