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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1월 19일
| 정조13
| 기유
1월 19일 疏首가 <지명>豐壤지명>에서 돌아왔다. <인명>李重祖인명>를 비롯해 金時全, <인명>金宗鐸인명>, <인명>孫潤慶인명>, <인명>李翼遠인명>, <인명>尹相烈인명>, <관직명>肇慶廟令관직명> <인명>姜世規인명>, 令監 <인명>姜世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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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2월 26일
| 정조13
| 기유
2월 26일 임금께서 榜文에 지방 유생들의 참여가 없다고 하시며, 방문을 3일동 개설하라하여 다음날 방문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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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1월 8일
| 정조13
| 기유
1월 8일 辰時에 임금의 수레가 <건물명>景慕宮건물명>을 참배하고 돌아올 때 수레를 멈추고 다리 난간에 걸린 깃발을 보고 <관직명>藝文提學관직명>을 불렀다. 그런데 <관직명>藝文提學관직명>이 미처 와서 대기하지 못하자 즉시 파직하고 수레 앞에서 <인명>李秉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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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21일
| 정조12
| 무신
7월 21일 太學에 또 일이 생겨 한 사람의 進士를 유배시키고 수습이 점점 더디어지니, 상소하는 일을 위해서는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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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24일
| 정조12
| 무신
10월 24일 疏首 <인명>趙奎鎭인명>와 掌議 <인명>柳鳳祚인명>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내니, 승정원에서 대답하기를, <관직명>左副承旨관직명>와 <관직명>右副承旨관직명>가 체직되었는데 아직 충원이 되지 않아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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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11일
| 정조12
| 무신
11월 11일 疏首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다. 어제 三更쯤에 임금으로부터 교시가 내려졌는데, 대궐문을 연 후에 倡義錄을 위한 상소의 疏首가 상소에 가담한 유생들을 이끌고 入侍하라는 것이었다. 상소에 가담한 유생들이 날이 밝지 않아 대궐문 밖에서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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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3월 13일
| 정조13
| 기유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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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15일
| 정조12
| 무신
7월 15일 <인명>黃聖休인명>와 <인명>趙奎鎭인명> 및 <인명>黃泰熙인명>가 <지명>尙州지명>의 倡義錄 책자를 쓰는 일을 다 마치지 못해 또한 <지명>泮村지명>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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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1월 3일
| 정조13
| 기유
1월 3일 임금의 수레가 풍년을 비는 큰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社稷으로 거동하였다. 아침식사 전에 <인명>金始全인명>와 <인명>李翼遠인명>가 찾아왔다. 이날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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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2월 18일
| 정조12
| 무신
12월 18일 또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다. <관직명>都事관직명> <인명>鄭基煥인명>가 찾아왔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소문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鄭<관직명>都事관직명>를 <관직명>承旨관직명> <인명>洪仁浩인명>의 집으로 보내 승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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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7일
| 정조12
| 무신
11월 7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 <인명>趙奎鎭인명>와 掌議 <인명>柳鳳祚인명>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 일이 많다는 이유로 되돌려 보냈다. 이날 세 번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는데, 승정원에서 대답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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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3월 3일
| 정조15
| 신해
3월 3일 <인명>黃弼熙인명>가 계속해서 <지명>板井洞지명>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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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14일
| 정조12
| 무신
7월 14일 <인명>黃泰熙인명>와 <인명>黃弼熙인명>가 <인명>趙錫簡인명>의 저택을 방문하여 여러 가지를 의논하고서 거기에 모인 많은 선비들이 <지명>尙州지명>의 倡義錄 책자를 써야 한다기에 집을 넓히기로 정하였다. 그 말처럼 바로 <지명>泮村지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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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1월 1일
| 정조13
| 기유
1789년 1월 1일 安東의 李重祖, 金始全, 金宗鐸과 義城의 申鳳朝, 永川의 鄭夏澗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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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2월 17일
| 정조13
| 기유
2월 17일 <인명>黃弼熙인명>가 계속 <지명>板井洞지명>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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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19일
| 정조12
| 무신
9월 19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들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또 해당 관원이 충원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되돌려 보냈다. 오후에도 또한 이와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소문을 받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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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18일
| 정조12
| 무신
7월 18일 고향의 소식이 오랫동안 끊긴데다 남은 자금이 다 떨어져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인명>黃夏鎭인명>가 기한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으니, 참으로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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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1월 20일
| 정조13
| 기유
1월 20일 <관직명>禮曹判書관직명>가 체직을 청하는 문서를 올려 <인명>鄭昌淳인명>의 前望單子에 임금이 낙점할 것이라고 하였다. 임금의 수레가 <건물명>景慕宮건물명>으로 거동하여 誕日茶禮를 위해서 그곳에 묵었다. 이 때문에 批答에 대한 대답이 점점 늦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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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3월 24일
| 정조13
| 기유
3월 24일 ················································ <인명>黃弼熙인명>가 黃成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기를 進士 <인명>黃冕源인명>에게 청하였다. 두 고을이 곧 ························· [首首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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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13일
| 정조12
| 무신
10월 13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이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다. <지명>서울지명>의 掌議 <인명>趙學元인명>이 오늘 아마도 상소문을 받아들이게 할 방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상소를 진행하고 유생들은 기대를 하고 즉시 상소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