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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1일
| 정조12
| 무신
9월 1일 <인명>黃聖休인명>의 병세가 조금 괜찮아졌다. 어제 승정원에서 비록 잠시 대권문 밖에서 호소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전적으로 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들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으나, 상소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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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27일
| 정조12
| 무신
9월 27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들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 이전과 같은 이유로 되돌려 보냈다. 정오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린 후에도 또한 이와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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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10일
| 정조12
| 무신
10월 10일 疏首와 상소문의 실무진이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러 가려고 하는데 <인명>全達德인명>이 이렇게 말했다."만약 상소문에 합하지 않으면 우리 全氏의 명단을 명부에서 잘라내어야 할 것입니다. 잘라내기 전에는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할 수 없습니다."疏首가 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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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1월 9일
| 정조13
| 기유
1월 9일 임금이 수레를 玉座로 삼아 後苑에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였다. 이날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인명>金宗鐸인명>와 <인명>鄭一僑인명>, 그리고 <인명>鄭夏澗인명>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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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20일
| 정조12
| 무신
10월 20일 疏首와 掌議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대답하는 것이 또 이전과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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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8월 24일
| 정조12
| 무신
8월 24일 國忌日이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讀疏 <인명>李翼遠인명>가 사고가 있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掌議 <인명>鄭奭東인명>과 寫疏 <인명>尹相烈인명>가 <지명>泮村지명>로 갔다. <관직명>都事관직명> <인명>李龜錫인명>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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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8월 27일
| 정조12
| 무신
8월 27일 到記科로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姜<관직명>監察관직명>이 고기와 서찰을 보내왔다. 倡義錄을 위한 疏廳이 비로소 성균관의 답장 통문을 받아 오후에 대궐문 밖으로 나갔다. 한 道았에서 두 개의 상소가 동시에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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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25일
| 정조12
| 무신
9월 25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들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 이전과 같은 이유로 되돌려 보냈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소문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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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15일
| 정조12
| 무신
10월 15일 疏首 <인명>趙奎鎭인명>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다. 掌議 <인명>柳鳳祚인명>는 외출하여 참여하지 못했다.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 일이 많다는 핑계를 대었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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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2월 24일
| 정조12
| 무신
12월 24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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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8일
| 정조12
| 무신
11월 8일 疏首 <인명>趙奎鎭인명>가 네 선생을 합친 상소의 뜻을 道의 유생들과 <지명>서울지명>에 있는 黃氏 여러 사람들에게 통고하였다. <인명>黃瑗인명>와 <인명>黃道源인명>, 그리고 <인명>黃夏鎭인명>가 처음에는 비록 고집을 부렸지만, 끝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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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8월 28일
| 정조12
| 무신
8월 28일 <인명>黃潤[土+正]인명>, <인명>黃宅坤인명>, <인명>黃錫老인명>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다. 倡義錄을 위한 상소 역시 같은 시기에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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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26일
| 정조12
| 무신
9월 26일 통행금지의 해제를 알리는 종이 울린 후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들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 이전과 같은 이유로 되돌려 보냈다. 오후에도 또 이와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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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16일
| 정조12
| 무신
10월 16일 <인명>黃聖休인명>의 병세가 조금 덜해져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掌議 <인명>柳鳳祚인명>가 돌아오고, <인명>李鎭東인명>가 찾아왔다.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掌議가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는 한마디 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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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1월 4일
| 정조13
| 기유
1월 4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인명>孫潤慶인명>를 비롯해 <인명>李翼遠인명>, <인명>李重祖인명>, <인명>金宗鐸인명>, <인명>尹相烈인명>, <인명>金始全인명>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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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2월 5일
| 정조13
| 기유
2월 5일 <지명>尙州지명>의 趙卞然이 과거시험을 보러왔다가 찾아왔다. <인명>河學浩인명>가 찾아왔다. <인명>趙奎鎭인명>와 <인명>黃聖休인명>가 <관직명>別檢관직명> <인명>宋益魯인명>를 방문했다가 <지명>貞洞지명>의 <관직명>洪承旨관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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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17일
| 정조12
| 무신
9월 17일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들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또 일이 많다는 것 때문에 되돌려 보냈다. 오후에도 또 이와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소문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움을 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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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7일
| 정조12
| 무신
10월 7일 아침식사 전에 또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으나 한마디 말도 없이 되돌려 보냈다. 오후에도 또한 이와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소문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인명>金履正인명>이 체직되고 <관직명>左副承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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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9일
| 정조12
| 무신
11월 9일 疏首와 掌議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 상의하여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오후에 또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상의해서 받아들겠다고 대답했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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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2월 7일
| 정조12
| 무신
12월 7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三司가 합의하여 전과 같이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임금이 특별히 다음과 같은 敎示를 내렸다."이번에 탄핵을 받은 臺官은 모두 교체하도록 하라."大司憲 <인명>李獻慶인명>, <관직명>掌令관직명> <인명>趙貞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