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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14일
| 정조12
| 무신
10월 14일 또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또 다시 이전과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인명>黃聖休인명>가 <지명>서울지명>의 掌議를 찾아갔더니 이렇게 대답했다."어제 저녁 令公 <인명>李亨元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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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 2월 27일
| 정조14
| 경술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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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4일
| 정조12
| 무신
7월 4일 會中의 여러 사람 의견은 金<관직명>典籍관직명>이 상소문의 초안을 지은 것은 그 일의 의리가 중대하기에 찾아가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종이 묶음을 준비하고 편지를 써서 金<관직명>典籍관직명>에게 보냈다. 편지에 대해서는 감사해 하고,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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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2월 9일
| 정조12
| 무신
12월 9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倡義錄을 위한 疏廳의 유생과 <건물명>丹溪書院건물명>의 사액을 위한 疏廳의 유생들이 철수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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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8월 15일
| 정조12
| 무신
8월 15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으나, <인명>鄭奭東인명>은 병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내니 즉시 내어보냈다. 정오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린 후에 또 상소문의 요지를 보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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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8월 21일
| 정조12
| 무신
8월 21일 疏首와 일행이 <지명>泮村지명>에 머물렀는데, <인명>黃潤[土+正]인명>, <인명>黃宅坤인명>, <인명>黃錫老인명>이 함께 묵었다. <인명>廬重文인명>과 <인명>宋好心인명>, 그리고 <인명>宋思智인명>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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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8월 25일
| 정조12
| 무신
8월 25일 國忌日이라 또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한두 곳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명부를 보니 <지명>영남지명>의 유생들은 모두 낙방을 면하지 못했으니 한탄스럽지 않는가? <인명>黃道源인명>와 <인명>黃學洙인명>를 비롯해 <지명>서울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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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8일
| 정조12
| 무신
10월 8일 아침식사 전에 또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 서로 의논하여 처리하겠다고 했다. 오후에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또 서로 의논하겠다고 말했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소문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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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9일
| 정조12
| 무신
10월 9일 또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내니, 담당 관료가 있어도 숙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 삼아 되돌려 보냈다. 오후에도 답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소문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花開의 <인명>全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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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8월 18일
| 정조12
| 무신
8월 18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내니, 여섯 <관직명>承旨관직명>가 입직하고 있었으나 國忌의 제사를 마치는 날에는 원래 상소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규칙이었다. 申時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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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30일
| 정조12
| 무신
10월 30일 또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는 한마디 말도 없이 되돌려 보냈다. 오후에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문을 지키는 書員이 상소문의 요지를 가지고 돌아와 이렇게 보고했다."승정원의 書吏가 상소문과 疏首의 이름을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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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8월 29일
| 정조12
| 무신
8월 29일 <인명>黃聖休인명>의 병세가 조금 덜해졌다. 날이 밝기 전에 <인명>黃聖休인명>는 병든 몸을 이끌고 疏首를 비롯해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과 함께 일제히 報漏門 밖으로 나아가 기다렸다가 들여가려고 하자 하인이 굳이 막아내며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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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28일
| 정조12
| 무신
9월 28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들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 서로 상의한 후에 받아들이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倡義錄을 위한 상소문의 요지에 대해서는 되돌려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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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8월 19일
| 정조12
| 무신
8월 19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두 차례나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다. 그러나 <관직명>同副承旨관직명> 洪令이 입직하지 않아 돌려보내왔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소문을 받들고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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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28일
| 정조12
| 무신
7월 28일 疏首와 두 疏色이 <지명>반촌지명>에 사는 상소와 관련된 실무진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상소의 일로 이제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께서 일제히 관복을 착용한 것을 뵌 연후에야 임금께 글을 올릴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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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6일
| 정조12
| 무신
10월 6일 疏首와 掌議 <인명>柳鳳祚인명>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으나, 문을 지키는 書員이 아직 차출되지 않아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내지 못해 즉시 집으로 되돌아왔다. 이날도 <관직명>同副令公관직명>이 또한 병을 앓아 숙직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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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11일
| 정조12
| 무신
10월 11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 <인명>趙奎鎭인명>과 掌議 <인명>柳鳳祚인명>가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내니, 승정원에서 서로 의논해서 처리하겠다고 말하고 되돌려 보냈다. 오후에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내니, 승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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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25일
| 정조12
| 무신
11월 25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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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1월 18일
| 정조13
| 기유
1월 18일 疏首가 先塋을 살피기 위해 <지명>豐壤지명>으로 갔다. <지명>安東지명>의 進士 <인명>權就度인명>를 비롯해 裵先生 형제, <지명>永川지명>의 <인명>成德龍인명>와 <인명>權時標인명>, <지명>連山지명>의 金<관직명>虞候관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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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2월 19일
| 정조13
| 기유
2월 19일 <인명>黃弼熙인명>가 계속 <지명>板井洞지명>에 있다가 位土田의 일로 戶曹 直方을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