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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1월 10일
| 정조13
| 기유
1월 10일 임금이 수레를 玉座로 삼아 春堂臺 출신과 堂下의 여러 무관들에게 활을 쏘는 시험을 보게 하였다. 이 때문에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상소의 일로 그 실무진들이 연일 <지명>貞洞지명>을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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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6월 3일
| 정조12
| 무신
6월 3일 <지명>仁同지명>이 본관인 宣傳官 <인명>張趾遠인명>가 찾아왔다. 斯文 <인명>趙奎鎭인명>의 설사 증세가 오후부터 회수가 조금 줄어 다행이었다. <인명>黃聖休인명>, <인명>黃弼熙인명> 등이 사례의 뜻을 표하였다. <관직명>監察관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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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23일
| 정조12
| 무신
7월 23일 <인명>趙奎鎭인명>의 설사하는 증세는 곧 점차로 줄어들었지만 나머지 증세가 아직도 여전하여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인명>趙錫簡인명>를 비롯해 <인명>孫必慶인명>, <인명>趙允浩인명>, <인명>李翼遠인명>가 찾아와서 상소의 일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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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3일
| 정조12
| 무신
9월 3일 疏首의 설사증세가 조금 덜해졌다. <인명>李鎭東인명>가 찾아왔다. 이날 또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申時 후에 임금의 수레가 궁으로 돌아왔다. <지명>서울지명>의 유생 다섯 사람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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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29일
| 정조12
| 무신
9월 29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들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 담당 관원이 낮잠을 잔다는 이유로 되돌려 보냈다. 정오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린 후에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내니, 담당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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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11일
| 정조12
| 무신
9월 11일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들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다. 나라에 많은 일로 처음으로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내지 못했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소문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直長 <인명>柳範休인명>를 비롯해 <인명>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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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2월 29일
| 정조12
| 무신
12월 29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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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6월 2일
| 정조12
| 무신
6월 2일 일행이 <지명>沙平지명>에 도착했다. 그런데 斯文 <인명>趙奎鎭인명>가 눈병을 앓고 있는데다 설사의 증세가 있었다. 이것은 몹시 심한 더위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출발한지 6일 만에 비로소 城에 들어갔다. 먼저 鄭<관직명>都事관직명>가 묵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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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6월 22일
| 정조12
| 무신
6월 22일 <관직명>長鬐縣監관직명> <인명>黃翼振인명>와 宣傳官 <인명>張趾遠인명>가 찾아왔다. 날이 저문 후에 <인명>黃夏鎭인명>가 와서 상소와 관련된 일을 의논하면서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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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8월 3일
| 정조12
| 무신
8월 3일 <인명>黃泰熙인명>가 <지명>반촌지명>에서 와서 倡義錄을 위한 상소의 疏首인 <인명>李鎭東인명>가 이 소청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꺼내 보여주려 하였으나 사환이 없어 한동안 전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것 역시 괴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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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2월 25일
| 정조12
| 무신
12월 25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인명>黃弼熙인명>의 사내종과 말을 돌려보냈다. <지명>安東지명>의 <인명>柳鳳祚인명> 本家에서 사내종과 말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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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14일
| 정조12
| 무신
9월 14일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들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다. 倡義錄을 위해 상소하는 사람들과 <지명>順興지명>에서 올라와 상소하는 사람들이 같은 때 나란히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다.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으나, 승정원에서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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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20일
| 정조12
| 무신
9월 20일 새벽닭이 운 뒤에 <인명>黃聖休인명>를 비롯해 <인명>柳鳳祚인명>와 <인명>尹相烈인명>가 報漏門 밖에 나아가 기다렸다. 이때 여러 승지들이 이미 승정원에 들어가고 오직 몇몇 승지만이 있었다. <인명>黃聖休인명> 등이 또 큰소리로 외치니,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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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2월 11일
| 정조12
| 무신
12월 11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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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6월 6일
| 정조12
| 무신
6월 6일 <인명>黃弼熙인명>가 토하고 설사하는 癨亂을 앓아 침과 약으로 즉효를 보았다. <인명>黃道源인명>가 또 찾아왔다가 갔다. 上疏에 참가한 일행[疏行]은 마땅히 <인명>黃泰熙인명>와 함께 같은 여관[舍館]에 묵었다. 그런데 거처가 눅눅하고 비좁아 묵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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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6월 23일
| 정조12
| 무신
| 혹서
6월 23일 더위가 너무 심해 출입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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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8월 4일
| 정조12
| 무신
8월 4일 <인명>黃夏鎭인명>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소청에서 손님을 응대하는 예절을 오로지 이 사람에게 맡겼기 때문에 일행이 억지로 그를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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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2월 26일
| 정조12
| 무신
12월 26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인명>金宗鐸인명>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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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15일
| 정조12
| 무신
9월 15일 새벽닭이 운 뒤에 <인명>黃聖休인명>를 비롯해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들이 報漏門 밖에 나아가 기다렸다. 그때 승지들이 이미 모여 있기에 문을 들어가고자 하니, 하인이 굳이 막았다. 그래서 큰소리로 이렇게 호소했다."저희들이 <지명>서울지명>에 머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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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21일
| 정조12
| 무신
9월 21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들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한 마디 말도 없이 되돌려 보냈다. 오후에도 또한 이와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소문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