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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6월 21일
| 정조12
| 무신
6월 21일 <인명>黃聖休인명>를 비롯해 <인명>趙奎鎭인명>, <인명>黃泰熙인명>, <인명>黃弼熙인명>가 상소문을 짓는 일로 일제히 <지명>泮村지명>에 사는 <관직명>典籍관직명> <인명>金紘인명>의 저택으로 갔다. 거듭 나아가며 삼가 받들어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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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8월 2일
| 정조12
| 무신
8월 2일 고향에서의 소식이 아직 오지 않았다. 상소하는 일에는 관계하는 곳이 많아서 서로 통고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내종에게 행장을 꾸려 보내 양쪽의 뜻이 엇갈리어 이와 같아 돌아갈 마음에 처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인명>呂俊復인명>가 도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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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6일
| 정조12
| 무신
9월 6일 罷漏 후에 임금의 수레가 행차하여 <건물명>西氷庫건물명> 나루까지 끌고 갔다. 그런데 밤사이에 강물이 크게 불어나 물이 양쪽 언덕까지 가득하고, 선창이 모두 떨어져나가 임금의 수레가 강을 건널 수 없었다. 監役官을 비롯해 <관직명>京畿監司관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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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8월 23일
| 정조12
| 무신
8월 23일 疏首와 상소의 여러 실무진, 그리고 <인명>黃聖休인명>, <인명>黃夏鎭인명>, <인명>黃弼熙인명>가 일제히 工曺의 直房에 나아갔다.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내니, 승정원에서 <관직명>都承旨관직명>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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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18일
| 정조12
| 무신
9월 18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들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관직명>同副承旨관직명>가 충원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되돌려 보냈다. 오후에도 또 이와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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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2일
| 정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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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임금의 수레가 新門 안에서부터 慕華館으로 행행하였다. 申時가 되자 新門 안으로 돌아와 임금께서 大闕에서 유숙하였다. 이날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인명>黃聖休인명>의 병이 완전히 나아 참으로 다행이었다. 疏首에게 설사의 증세가 갑자기 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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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5일
| 정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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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창의록을 위한 상소에서는 땅에 엎드려 호소하는 일로 일제히 <지명>沙平지명>으로 달려간다고 했다. 이 사실을 <인명>黃泰熙인명>에게 통고하니 그가 <지명>沙平지명>을 향해 출발하고, <인명>黃弼熙인명>와 <인명>趙允浩인명>가 수행했다.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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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0월 1일
| 정조12
| 무신
10월 1일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 한마디 말도 없이 되돌려 보냈다. 오후에도 또한 이와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소문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寫疏 <인명>尹相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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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13일
| 정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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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3일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들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다. 그러나 또 나라에 많은 일로 곧 집으로 돌아왔다. 都廳 <인명>趙允浩인명>와 <인명>黃泰熙인명>가 함께 <지명>貞洞지명>에 있는 黃<관직명>參判관직명>의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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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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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太學의 掌議에게 과거시험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 나머지 생원과 진사, 그리고 下齋의 유생 49명이 밀봉한 상소문으로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다. 대개 倡義錄의 상소와 관련된 일을 논한 것이었다. 즉시 엄함 批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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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7월 22일
| 정조12
| 무신
7월 22일 태학의 일이 수습되어 東一房의 掌議가 선출되었다. <인명>黃夏鎭인명>가 직접 <인명>洪五蕃인명>의 집으로 가서 태학에서의 통문에 대한 답장의 일을 의논하고 왔다. 이날 답장의 통문이 과연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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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2월 20일
| 정조12
| 무신
12월 20일 都目政事 때문에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일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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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7일
| 정조12
| 무신
9월 7일 임금의 수레가 靖陵에서 孝彰墓로 행행하였다. 밥을 먹은 후에 <인명>黃聖休인명>와 <인명>趙奎鎭인명>가 동무가 되어 孝彰의 왼쪽 산기슭에 올랐다. 그랬더니 병졸과 군마가 이미 산기슭 아래에 도착했고, 旗兵들이 온 들판을 뒤덮었다. 임금의 수레가 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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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10일
| 정조12
| 무신
9월 10일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 여러 사람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다. <지명>順興지명>에서 상소하러 올라온 사람들이 또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였다. <인명>黃夏鎭인명>와 <인명>黃學洙인명>가 잡아당겨내려 했으나 그렇게 할 수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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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2월 28일
| 정조12
| 무신
12월 28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관직명>察訪관직명> <인명>鄭衡臣인명>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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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5월 27일
| 정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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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액을 청하는 일을 시작하는 아무 달 아무 날에 여러 가지 절차를 의논하여 정했다.(위에 본 서원의 日錄에 나온다.) 斯文 <인명>趙奎鎭인명>가 (<지명>서울지명>로) 떠나는 것을 허락하자 모임에 있던 많은 선비들이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큰일이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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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8월 1일
| 정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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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인명>李翼遠인명>와 <인명>柳鳳祚인명>가 <지명>반촌지명>의 소청에서부터 도착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 보낸 편지에는 끝내 답장이 없어 괴이하게 생각했다. 疏首 <인명>趙奎鎭인명>와 掌議 <인명>鄭奭東인명>이 義禁府의 直房으로 <관직명>都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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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4일
| 정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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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4일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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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30일
| 정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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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0일 아침식사 전에 疏首와 상소의 실무진이 상소문을 받들고 대궐문 밖에서 호소를 하고, 상소문의 요지를 들여보냈더니, 승정원에서 한마디 말도 없이 되돌려 보냈다. 오후에도 또한 이와 같았다. 申時가 되어 관무를 마친 후에 상소문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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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9월 12일
| 정조12
| 무신
9월 12일 殿講[성균관 유생들이 치르는 유가경전 암송시험]으로 대궐문 밖에서 호소하는 것을 멈추었다. 처음 경상우도의 합격자 명단을 보니 <인명>黃巖老인명>와 <인명>黃磻老인명>가 나란히 급제하였는데, 그 형이 1등을 하여 다행스럽게도 <관직명>左副承旨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