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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7월 11일
| 癸亥
| 맑고 뜨겁다.
하회(河回) 하인이 또 와서 정(定) ․ 용(容) ․ 선(宣) 세 아이를 맞이해 가니 밤에 뱃놀이를 가기 위해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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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6일
| 癸亥
| 아침에 흐리고 무지개가 뜨고, 이어서 개고 바람 불고 춥다.
응관(應貫)에게 사람을 보내 응섭(應燮)에게 보낼 편지 세 장을 겸하여 부치면서 또한 자금의 차대에 관한 요청을 했는데, 들어 줄 수 있을지의 여부도 물어보았지만, 어찌 감히 학수고대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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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0월 5일
| 壬戌
| 맑고 바람 불고 춥다.
앞집의 상제(祥祭)날 때문에 빈우들이 왔다 갔고, 서울 장사동(長沙洞)에 우거하는 공진(公振)이 우연히 와서 고향을 잠시 들렀다가 점심식사를 하고 돌아갔다. 우천(愚川) 부인이 이틀을 머물고 미남(美南)으로 넘어갔다. 밤에 오계(梧溪)족조(族祖)를 만나 듣기에 초곡(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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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2월 22일
| 壬戌
| 맑다.
수표정(水標町) 신동(新洞) 석평(石坪)에 편지를 써서 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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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2월 21일
| 癸亥
|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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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3월 19일
| 癸亥
| 맑다.
개를 잡고 태고정(太古亭)에서 곡회(曲會)를 열었는데, 노소 빈객이 여전히 30여명이 남았다. 권(權)진사(進士)를 조문하고 또 백산정(白山亭)을 방문했는데, 대소댁의 배치와 규모가 대략 역량의 우열대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더욱 부럽고 축하할 만하니 사람의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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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8월 19일
| 甲子
| 맑다.
증조모의 휘신인데 병으로 참배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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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7월 13일
| 癸亥
| 흐리고 바람 불고 낮에 비가 조금 내리다가 이어서 그치다.
처서(處暑)의 비가 오히려 너무 적은 것이 유감이다. 저녁에 정아(定兒) 등 다섯 숙질들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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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1월 16일
| 癸亥
| 맑고 바람 불고 춥다.
오늘은 동지(冬至)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운물(雲物)을 살펴보았는데, 동남서쪽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했으니 괴의했다. 차례를 지냈다. 어제 신문을 보니 상해(上海) 내무총장(內務總長) 김구(金九)가 길림(吉林)의 배일거두인 김응섭(金應燮)과 더불어 매우 긴밀히 체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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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월 8일
| 甲子
| 맑다. 밤에 추위가 갑자기 심해지다.
무원(武元) 사형(査兄)이 찾아왔으니 오래 떨어져 지내던 뒤 끝에 반갑고 기뻤다. 또 건여(建汝)와 송(宋) 면장(面長)이 마침 이르렀기에 촌내 여러 사람들과 모두 모여 윷놀이 하고 술을 마셨다. 음식은 상점에서 사 온 것이었다. 새벽닭이 울 때 까지 즐겁게 담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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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0월 8일
| 壬戌
| 흐리고 춥고, 밤에 또 바람 불고 눈이 내리다.
헌아(憲兒)가 유동(酉洞)으로 가서 권(權)아사(雅士)를 조문했다. 노첨(鲁瞻) 형이 와서 묵었다. 군계(郡季)의 편지를 보니, 순백(淳伯) 형이 겨드랑이 종기 때문에 그의 종씨와 함께 막 의원에 와서 치료하고 있다고 하니, 놀라고 우려됨이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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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2월 25일
| 壬戌
| 새벽에 싸락눈이 내리고, 잠깐 흐리고 잠깐 맑았고, 눈이 조금 오고 바람이 크게 불다.
의인(宜仁)에 하인을 보내 사장(査丈)어른 부자에게 편지를 써서 부쳤다. 우편으로부터 나주군수의 편지를 보았고, 겸하여 수(壽)운에 화답한 시 및 2원의 부조금까지 보내주셨으니 감사했다. 20여명의 소작인을 데리고 소나무 땔감 백 수십 단을 운반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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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2월 24일
| 癸亥
| 맑고 따뜻하다.
비로소 사곡(寺谷) 묘소를 살피러 갔는데, 새해가 지난 뒤 이미 수개월이 지났으니 죄송스럽고 탄식하고 죄송스럽고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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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5월 10일
| 癸亥
| 맑다.
아침저녁으로 자못 서늘한 기운이 들었으니 이는 크게 가물 징조이기에 우려되고 탄식함이 그지없었다. 고창(高昌) 사현(士賢) 형이 우안(愚安)의 산을 팔 뜻으로 지난 달 편지를 보내 준 것이 전하는 자가 소식이 없다가 오늘 비로소 받아보게 되었다. 때문에 답장을 써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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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7월 8일
| 癸亥
| 맑고 뜨겁다. 날이 다시 찌는 듯 더워서 사람과 곡식이 모두 타는 듯했다.
신문을 보니 지난 달 27일 경에 압록강(鴨綠江) 변 바닷물이 폭풍으로 크게 넘쳐서 용천(龍川) 일대에 사상자가 천여 명이 났고 침수되고 파괴된 가옥이 부지기수였으며, 양서면(楊西面)은 전멸했다. 또 인천(仁川) 굴업도(堀業島)에서도 해일이 일어 사상자가 8만여 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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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3일
| 癸亥
| 맑고 무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다.
며느리가 소산(素山)에 반견(半見)하러 가기 위해 소댁(小宅)의 장부(長婦)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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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1월 19일
| 癸亥
| 맑다.
헌아(憲兒)가 안동(安東)으로 떠났는데, 아마도 은행의 부채 상환 기한을 연기하기 위해서 인듯하니 어찌하고 어찌할까? 저녁에 돌아왔다. 장아(長兒)도 또한 방학을 맞이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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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월 11일
| 甲子
| 맑다. 바람이 크게 불고 매우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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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2월 27일
| 甲子
| 잠깐 맑고 잠깐 흐리다. 오후에 비가 오기 시작하다. 밤새도록 비가 쏟아지다.
조카들이 2학년으로 올라갔다. 청산(聽山) 및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암정(巖亭)에 올랐는데, 못 가에서 축당(築塘)에 연꽃을 심었고 화훼를 되는대로 심었다. 그리고 이어서 율시 두 수를 지었다. 오후에 비가 오기 시작하여 옷 젖는 것을 무릅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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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0월 7일
| 壬戌
| 아침에 안개 끼고 흐리고 춥다. 밤에 또 눈이 조금 내리다.
수정(壽町) 사형 및 용손 어미의 편지를 보니 집안 제절이 편안하여 기뻤다. 인아가 또 인쇄소 일을 그만두고 장차 서울로 가고자 했다. 심지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에 이는 작은 근심이 아니니, 어찌하겠는가? 아중이 어제 마진(麻津)으로 가서 제사에 참여했는데, 진흙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