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0년 8월 5일
| 明宗 5
| 庚戌
파루(罷漏) 후에 우리들이 문으로 나아가 뵙고 묻기를 "어제 계(啓)한 바에 <인명>구수담(具壽聃)인명>과 붕비(朋比)했다는 것과 고변한 사람을 때려죽였다는 말에는 어찌 대처하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가군(家君)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한 것이 아닌데 어
-
1550년 12월 11일
| 明宗 5
| 庚戌
<지명>연곡(燕谷)지명>의 서북쪽 (庚座)이며, 거북모양의 산에서 장사를 지냈다. 아아, 화(禍)가 일어나는 것은 일어 난 날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일어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 선군(先君)의 화(禍)는 청홍감사(淸洪監司) 때에 일어 난 것이 아니라 갑
-
1550년 8월 28일
| 明宗 5
| 庚戌
<인명>신이경(辛而慶)인명>, <인명>이화보(李和甫)인명> 형이 <지명>수산역(水山驛: 충남 제천시 수산면)지명>에 오셔서 곡을 하셨다. 저녁에 <지명>장림(長林)지명>에 도착하였다. 단양(丹陽) 군수가 장막을 설치하고 노전(路奠)을 지내고자하였으나 마음
-
1550년 8월 10일
| 明宗 5
| 庚戌
삼성(三省)이 교좌(交坐)하였는데, 한 차례 형신을 받았다. <인명>이치(李致)인명>는 형을 반도 받지 않아 숨이 끊어졌다.【<인명>이치인명>와 선군(先君)은 죄목이 비록 경중이 있으나 대동소이하였기 때문에 형신을 같이 받았는데 먼저 운명한 것은 상중(喪中)이었
-
1870년 11월 23일
| 高宗 7
| 庚午
행장을 꾸려 출발했다. 말은 소청(疏廳)이 올라올 때 짐 싣는 말로 샀는데, 둔하고 용렬하여 팔리지 않는 것이었다. 동문 밖으로 나오니, 일행은 이미 짐을 꾸렸는데, 혹은 가마를 타고 혹은 말을 세내어 모두 몸을 맡기는 데는 걱정이 없었다. <인명>정백(正伯)인명>
-
1870년 11월 14일
| 高宗 7
| 庚午
아침에 일어나서 호상(湖上) 어른의 여관으로 가서 안부를 물었다. 물러나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 몇 자를 적어서 시중드는 사람 편으로 부쳤다. 식사 후에 호상 어른을 떠나보내고 길을 등져 떠났다. 낮에 반정(盤亭)의 족인 집에 들어가서 잠깐 기쁘게 이야기했는데, 적조했던
-
1550년 8월 14일
| 明宗 5
| 庚戌
사경(四更: 오전 1시~3시) 즈음에 돌아가셨다. 도사(都事)가 도성에 들어가서 아뢰니 한성부(漢城府)에서 검사하라고 명했다. 【이곳은 기내(畿內) 10리이기 때문에 한성부에서 관장한다.】 양사(兩司)가 비로소 정계(停啓)했다.
-
1567년 10월 5일
| 宣祖 1
| 丁卯
성상(聖上)께서 대신들에게 특명을 내리시어 "을사(乙巳) 이후 억울하게 죄를 받은 자들을 신리(伸理)하라."고 하셨다. 이에 2품 이상이 함께 의론하여 계(啓)하길 "<인명>이기(李芑)인명>와 <인명>윤원형(尹元衡)인명>의 무리가 예전의 분을 품고 있다가 선왕(
-
1550년 8월 26일
| 明宗 5
| 庚戌
찰방 숙주(察訪叔主)께서 노복과 말을 거느리고 <지명>금탄(金灘: 충주 탄금대 주변의 남한강)지명>에 오셔서 곡을 하셨다.
-
1550년 7월 17일
| 明宗 5
| 庚戌
추고(推考)하는 전지(傳旨)가 사헌부에 내려졌다. <인명>유섭(柳涉)인명>이 와서 가군(家君)께서 묻기를, "역당(逆黨)의 누락된 노비를 추쇄(推刷)할 때 내가 어떻게 처리하였는가?"라고 하였다.
<인명>유섭(柳涉)인명>이 답하기를, "<지명>유신현(維
-
1550년 7월 16일
| 明宗 5
| 庚戌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이 합사(合司)하였다. 오후에 사헌부 서리(書吏) <인명>임은손(林殷孫)인명>이 와서 배알하니, 가군(家君)께서 즉시 친히 불러 보았다. <인명>임은손(林殷孫)인명>이 서찰 하나를 올려서 그것을 보니, "양사(兩司)가 성상소(城上
-
1550년 8월 2일
| 明宗 5
| 庚戌
양사가 배표(拜表) 때문에 모화관(慕華館)에 모였는데 감사도(監司道)의 문안을 가지고 온 사람이 직접 양사가 모인 자리에서 바쳐서 곧바로 열어보니 전답과 노비를 환급한 일은 없고 다만 <인명>정랑(呈琅)인명>【모산수(毛山守)의 이름이니 역적의 무리이다.】의 비부인
-
1550년 9월 2일
| 明宗 5
| 庚戌
입관을 하고 빈소를 차렸다.
-
1550년 8월 7일
| 明宗 5
| 庚戌
‘삼성교좌(三省交坐)하여 위엄을 크게 보이며 가군(家君)과 <인명>이치(李致)인명>에게 원정(元情) 내용을 반복하여 추문(推問)하였으나 굳게 거부하며 불복했으므로 드디어 한 차례 장형을 받았다. 추관(推官)이 입계(入啓)하여, "전지(傳旨)에서 말씀하신 내용에 대하
-
1550년 8월 20일
| 明宗 5
| 庚戌
발인을 하여 <지명>두모포(豆毛浦: 동호대교 북단, 옥수동)지명>에서 배를 탔다. <인명>박공보(朴公輔)인명>, <인명>최자수(崔子粹)[최덕수(崔德秀)]인명> 형이 서로 곡을 하고 헤어졌다.
-
1550년 8월 3일
| 明宗 5
| 庚戌
양사가 합사(合司)하였다. 노비 <인명>의성(義成)인명>을 시켜 사헌부에 가서 탐문하게 하였다. 이 도사(李都事)【■■형님의 빙군이다. 당시 의금부 도사셨다.】가 와서 위로하였는데 가군께서 말씀하시길, "벼슬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벼슬하면 옥에 들어가지 않는 자가
-
무○년 이정훈(李鼎勳)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이정훈, 김성익
| 안동 오천 광산김씨 설월당종택
君弼兄 謹候上狀。 【霜風日高寒。豈勝悵悵悚】自承旆住府邸。每擬一進旅次。以執主人之禮。而適値親癠猝添。差池未果。日者之行。又在華旆旣啓之後。竟未得一握敍別。此心耿結。如食物不下也。不審冒寒跋涉之餘。兄履珍嗇。一行僉啓處各得康勝否。吾嶺値此厄運。么麽亂孼輩敢抗一道正論。至使僉君子終不免聚首速獄之辱。
-
○○년 이효연(李孝淵)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이효연
| 안동 가송 영천이씨 농암종택
肯構堂 靜座 入納。聲光相續。而書訊相闕。此不特傾鄕無其情。而頹惰使之爾。居然觱寒方甚。伏惟靜履起居珍嗇。省節均迪。胤君讀書硬着。更有向上之望。老仙令候神佑。僉從叔若諸狀。俱何如。並切仰遡之至。從弟。二老近節粗免。大家餘皆無恙。是爲深慰。而從兄家延婦屬耳。滋况滿室。此則座下前日事。弟亦今已晩矣。却一
-
◯◯년 ◯◯◯(◯◯◯)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안동 오천 광산김씨 설월당종택
龍城 牙中 [手決] 答寄舍弟再昨。送唜尙。未及得達。而昨夜官便至。得見手書。慰豁千萬。第伏聞父主腫患。尙未完合。又有感冒之候。伏切憂煎。此處。母氏又自昨午。左邊牽痛。不能屈伸。呼苦不絶。悶極悶極。罔知攸措。瑞國。再昨上來。終日相話。歸時邀以明日更來。卽答以有齒痛及傷寒之候。當觀勢爲之矣。昨昏。厥
-
○○년 이태순(李泰淳)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
| 이태순, 이인재
| 안동 도산 진성이씨 초초암종택
李君奉復。屢見書問。一未奉答。老者何足責也。而時時思惟。愧甚於感。歲色垂窮。重侍餘。看讀何書。聞沙孫往在新亭。料當還家。而多聞其前所未聞者。幷與之愛幸無對。慤孫三餘所課者。只是先藁數三冊。其工惟在歇后非歇后之間。儅不見斥於其師門耶。爲渠恐悚無已。老翁奄見窮歲。感舊而已。添齡而已。又有何況之爲言哉。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