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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8월 6일
| 明宗 5
| 庚戌
가군(家君)께서 형옥지기를 시켜 우리들에게 글을 남기어 말씀하길, "너희 누이를 회현방(會賢坊)【여동생의 시댁】으로 보내고 너희 서모(庶母)가 속히 <지명>황주(黃州)지명>【서모의 본가】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셨다.
도사(都事)가 <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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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1월 11일
| 高宗 8
| 辛未
<지명>금성(金城)지명>의 심부름꾼을 매우 기다렸으나 오지 않아 고민되고 답답했다. 주관(主官)도 또한 그가 아직도 관(館)을 정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면서 교리를 보내 불러와 나와 같은 곳에서 5~6일을 같이 지내고 들여보낼 계획으로 누차 전갈하니, 편하지 않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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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20일
| 高宗 7
| 庚午
종가에서 전별주를 마시고 오후에 길을 떠난 사람은 이장언, 이선휴, 김헌락, 김정백, 김숙헌과 나이고, 모시고 뒤따르는 자는 산운의 두 젊은이와 경능 뿐이었다. 행렬이 옹천 시장에 도착하니 시간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앞에는 들어갈 만한 객사가 없어서 그대로 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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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29일
| 高宗 7
| 庚午
아침 일찍 출발하여 <지명>삼교(三郊)지명>에 이르러 수위(首位)의 행차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뵙고 전송하였고, 나와 <인명>원진(元振)인명>, <인명>숙헌(叔獻)인명>은 지름길로 나아가 <지명>보촌(保村)지명>에 들어갔다. <인명>찬부(贊夫)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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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1월 10일
| 高宗 8
| 辛未
<지명>금성(金城)지명>의 가마꾼이 돌아오는 길에 들려 중현(仲賢)의 편지를 받았다. 편안하게 도착했고 탈이 없다고 하니 다행스러웠으나 우선 거정(居停)되지 않고 여점(旅店)에 머물고 있었고, 주쉬(主倅)는 <지명>회양(淮陽)지명>과 겸관(兼官)이어서 <지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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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9월 3일
| 明宗 5
| 庚戌
성복(成服)을 했다. 반구(返柩)할 때 권도를 쓰라고 한 말은 숙주(叔主)의 분부가 아니고 당시에 반복하여 상의하던 말씀이었다. 경황이 없는 가운데 <인명>성무(成茂)인명>가 잘못 듣고 잘못 전하였다. 다급한 날에 불초한 우리가 의절(義節)을 알지 못하여 망령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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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7월 29일
| 明宗 5
| 庚戌
<인명>석호겸(石好謙)인명>【<인명>석구(石球)인명>의 아들이다.】이 뵈러 와서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 <연도>유신현(惟新縣)연도>의 문안이 사헌부에 도착하였는데 환급에 대한 서목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또 말하길, "사또가 <지명>초정(椒井)지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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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8월 13일
| 明宗 5
| 庚戌
머물렀다. 도사(都事)가 아전을 시켜 출발을 독촉하게 하였다. 신기(身氣)가 편치 않으셔서 굳게 거절하고 가지 않았다. 파루(罷漏) 뒤에 대손(大孫) 등을 거느리고 쫓아가서 증세를 자세히 살피니 이미 전날과 달랐다. 삽기(啑氣)가 수시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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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1월 6일
| 高宗 8
| 辛未
<지명>모진(毛津)지명>을 출발하여 20리를 갔다. <지명>수청령(水靑嶺)지명>을 넘었는데, 지나온 여려 재들보다 넉넉히 장인의 항렬에 처해있었으나 임목이 빽빽하고 풀이 난 이후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재를 내려와 식량을 운반하던 터[運粮墟]를 지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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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8월 9일
| 明宗 5
| 庚戌
첫 닭이 울 때 나는 이 도사(李都事) 댁으로 갔다. 어제 저녁에 도사께서 사람을 시켜 나를 불러서는, "사람들이 모두 영공께서 불복한 것을 나에게 잘못으로 돌리며 ‘어째서 빨리 승복시키지 않는가?’라고 하는데, 나는 승복할 경우의 이로움과 해로움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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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8월 4일
| 明宗 5
| 庚戌
금부당상(禁府堂上)인 판부사(判府事) <인명>윤개(尹漑)인명>, 지사(知事) <인명>박수량(朴守良)인명>, <인명>윤원형(尹元衡)인명>, 동지사(同知事) <인명>심광언(沈光彦)인명> 등이 출근해서 집무를 시작하여 원정(元情)을 진술하였다. 【나중에 진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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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1월 8일
| 高宗 8
| 辛未
장언(章彦)과 중현(仲賢)이 모두 늦게 출발하여 내가 객관을 정하는 것을 보고 가려했으나 도부(到付)가 너무 늦을까 염려되었다. 장언은 앞으로갈 길이 또 백여 리를 넘으니 떠나 갈 것을 권하며 "걱정하지 말라. 내가 어찌 스스로 하는 지모가 없겠는가?"라고 했다. 식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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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8월 11일
| 明宗 5
| 庚戌
파루(罷漏) 후에 나가서 동대문 밖 김 첨사(金僉使) 댁에 머물렀다. 양사(兩司)가 연이어 계를 올렸으나 상(上)이 모두 윤허하지 않으셨다. 도사(都事) <인명>우언겸(禹彦謙)인명>이 사람을 시켜서 길을 떠나기를 재촉하게 했는데, 군급(窘急)한 중에 노자를 마련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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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7월 24일
| 明宗 5
| 庚戌
나의 장인 <인명>황윤중(黃允中)인명>께서 말하시기를, "내가 어제 대사간(大司諫)의 집에 가서, 【대사간(大司諫)은 곧 <인명>원계검(元繼儉)인명>으로 <인명>황 빙군(黃聘君)[황윤중(黃允中)]인명>의 사촌이다.】 영공(令公)의 일을 물었는데, 대사간(大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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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12일
| 高宗 7
| 庚午
낮에 모두원(毛頭院)에 머물러 곤지점(困地店)에서 묵었다. 따뜻한 방을 얻어 자형(姊兄)과 함께 잤다. 잡은 방이 매우 좁아 옷도 벗지 못하니, 한 가지 고생스러운 모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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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8월 15일
| 明宗 5
| 庚戌
한성참군(漢城參軍)과 동부참봉(東部參奉)이 나와서 하리(下吏)들을 시켜 상처의 크기만 보고 물러갔다. 동대문 밖 첨사댁에 돌아와 염을 했다. 본가와 이 도사댁(李都事宅)에 관을 만들 목판이 있어서 도사(都事)가 목수를 시켜 살펴보게 하였는데 모두 썩고 깨져서 쓰기 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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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8월 29일
| 明宗 5
| 庚戌
고개를 넘으니 영천 외숙주(榮川外叔主)와 <인명>이대용 사거(李大容思擧)[이사거(李思擧)]인명>형과 <인명>이 습독(李習讀)[이현우(李賢佑)]인명>이 <지명>요원(腰院: 영양)지명>에 오셔서 곡을 하셨다. 앞서 이곳 원(院)에서 성례(成禮)를 하고자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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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8월 27일
| 明宗 5
| 庚戌
배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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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7월 22일
| 明宗 5
| 庚戌
<인명>석구(石球)인명>가 <지명>유신현(維新縣)지명>에서 문안(文案)을 가지고 바로 집으로 와서 말하기를, "환급서목(還給書目)을 온갖 방법으로 찾아보았으나 끝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의 문안(文案)을 있는 수대로 다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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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9월 1일
| 明宗 5
| 庚戌
풍기 숙주(豊基叔主)께서 <지명>석현(石峴: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지명>에 오셔서 곡을 하셨다. <지명>회천(檜川)지명>에 이르니 <인명>전응방(全應房)인명>이 와서 전(奠)을 지냈고, 아우 <인명>치(寘)[이치(李寘)]인명>가 <지명>기현(丌峴: 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