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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1월 9일
| 高宗 8
| 辛未
<지명>금성(金城)지명>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들릴 것이라 생각하고 집안 편지와 서울에 부치는 편지를 썼다. 기침과 땀으로 정신이 혼미하여 말이 되지 않으니 가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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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8일
| 高宗 7
| 庚午
| 싸락눈이 내릴 조짐이 있다.
싸락눈이 내릴 조짐이 있어 아침 식사를 하고도 출발하지 못했다. 갑자기 또 잠시 눈이 개어 길에 올랐다. 겨우 5리쯤 갔는데 주먹만 한 폭설이 내려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다. 말을 재촉했으나 주점이 없어 무릅쓰고 가서 <지명>신단(新垣)지명>으로 들어갔다. 소록(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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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24일
| 高宗 7
| 庚午
뒤에 오는 행렬을 위해 지체하며 기다렸는데, 식사 후에 여러 행렬이 도착했고 <인명>정백(正伯)인명>도 뒷쫒아 이르렀다. 대개 돈을 아끼지 않고 급히 구하여 일부러 쾌마를 얻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출발하여 도착했는데, 이미 30리를 왔으니 그 빠르고 민첩함을 알만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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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29일
| 高宗 7
| 庚午
제석(除夕) 때문에 관사(館舍)에서는 잠시 머물 수 없었으나 오늘은 관례대로 주막 주인이 손님을 받지 않으려 할 것이고 앞서 나아갔다가 군색함을 당하게 될 것을 예상할 수 있어 출발하지 못하고 머물 계획이었다. 거리 문안에 누추한 방에 갇혀 엎드려 무료하게 머리를 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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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24일
| 高宗 7
| 庚午
아침에 일어나 <지명>금계(金溪)지명>에 집으로 보내는 편지 몇 글자를 적어 부쳤는데, <인명>경릉(景能)인명>이 여기서 돌아간다는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식사 후에 길을 나섰는데, <인명>응소(應韶)인명>는 앞의 언덕에서 전송하면서 책 상자를 쌀 때 넣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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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6일
| 高宗 7
| 庚午
| 쾌청하다.
쾌청했지만 온 땅에 눈이 한길 쌓여 가는 길이 막히고, 찬바람이 사납게 불어 지붕과 나무를 마구 흔들어서 결코 길을 갈 수 없었다. 늦은 아침을 먹은 뒤에 여러 의론이 <지명>산양(山陽)지명>까지 40리는 오전에 도달할 수 있으니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가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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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15일
| 高宗 7
| 庚午
출발하려고 했는데, <인명>윤사선(尹士善)인명> 생가가 있는 마을이 20리를 넘지 않는다고 했다. 혹 <인명>사선인명>이 상제(祥祭)를 지내고도 머물며 돌아가지 않았다면 길을 돌아가는 수고를 아껴서 한 번 만나 조문하는 인편을 잃어버릴 수 없다고 생각해서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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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1월 4일
| 高宗 8
| 辛未
식후에 숙헌(叔獻)이 정해 준 여관을 보니 정결하고 적합했다. 선휴(善休)를 송별하고 동협(東峽)의 길로 나아갔다. 대저 이 형이 갈 길이 가장 험하고 멀었으나 혼자 가니 더욱 염려가 될 만했다. 길을 나누어 북쪽 거리로 들어가니, 숙헌이 전송하러 성교(城郊)에 이르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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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21일
| 高宗 7
| 庚午
아침 전에 정 우(鄭友)가 작별하고 갔는데 고생스럽게 방문했으니 감사할 만하다. 밥을 먹은 뒤에 눈이 내리는 것이 자못 큰 눈이 내릴 조짐이 있었다. 대저 이번 행차에 항상 눈과 더불어 짝하게 되었는데 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니 탄식스럽다. 눈을 무릅쓰고 길을 떠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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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10일
| 高宗 7
| 庚午
아침 전에 관청의 하인이 문첩(文帖)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으니 대개 감영의 관문(關文)이 본관(本官)에 도착하였고, 여기에 데리고 오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가다가 집으로 돌아온 저녁부터 여전히 기침 감기에 괴로워 이불을 둘러싸고 신음하던 뒤 끝에 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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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17일
| 高宗 7
| 庚午
출발하여 <지명>서빙진(西氷津)지명>에 도착했다. 강이 얼어 탄탄한 길이었다. 보니 땔나무를 실은 수레 수십이 일시에 건너가 견고함에 염려가 없었다. 그러나 인마(麟馬)가 모두 들어가는 것 또한 위험을 건너는 방도가 아니었다. 보내는 말은 아래 길로 가게하고 직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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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1월 1일
| 高宗 8
| 辛未
<지명>원주(原州)지명>를 출발하여 낮에 <지명>횡성(橫城)지명>에서 점심을 먹었다. 정백(正伯)을 만나위해 머물 곳을 정하고 그대로 머물렀다. 점심을 먹고 중현(仲賢)과 정백이 정진사(鄭進士)를 찾아보았다. 바로 젊은 사람으로 신축(辛丑)년 생이었으나 당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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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19일
| 高宗 7
| 庚午
| 바람 불고 추운 것이 다시 심해지다.
바람 불고 추운 것이 다시 심해졌으니 길가는 일 때문에 매우 근심된다. 아침밥은 종서 집에서 준비해 와서 밥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났다. 말이 조금 생기가 있었는데 대개 비로소 죽을 먹었기 때문이니, 근심이 없을 만하다. <지명>망천(輞川)지명> 여러 사람들이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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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25일
| 高宗 7
| 庚午
아침 식사 전에 매암점(梅巖店)의 사람이 또 20량의 소전(小錢)을 가지고 서리를 무릅쓰고 10리를 일부러 와서 바꾸기를 청했는데, 그 마음이 측은했다. 영남의 경계 지역에서는 온갖 물건이 서로 통용되지 않아서 영남에서 쌀을 사 한 해를 보낼 계획으로 삼는다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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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12일
| 高宗 7
| 庚午
<인명>원직(元直)인명>이 아내를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종숙부가 처음에는 형추(刑推, 형장(刑杖)을 써서 심문함)의 결말을 보려고 했지만 부음을 듣고 곧바로 돌아갔다. 호상(湖上) <인명>이시백(李始伯)인명> 어른이 들어왔는데, 대개 실기(實記)를 태우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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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14일
| 高宗 7
| 庚午
아침 먹기 전에 끝내 주서 형(注書兄)의 부음을 받으니, 이 무슨 천명이고, 이 무슨 운수인가? 가슴이 막히고 간담이 떨어져 정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 병 소식 이후로 가슴에 못 하나가 박혔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내려가는 날에 얼굴을 보고 이별하지 못하니 천고에 사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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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27일
| 高宗 7
| 庚午
뒤에 오는 행차를 기다려 함께 출발했다. <지명>유곡(酉谷)지명>과 <지명>해저(海底)지명>의 행차 및 <지명>신천(新川)지명>과 <지명>하계(下溪)지명>의 행차가 <지명>죽령(竹嶺)지명>에 이르러 멀지 않아 장차 길을 나누어야 하니 미리 매우 한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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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22일
| 高宗 7
| 庚午
식사 후에 <인명>위양(渭陽)인명>에게 돌아간다고 말씀드리기 위해 사재(司宰) 직소(直所)로 나가려고 <지명>전현(磚峴)지명> 위에 이르니, 범(凡)이라는 종이 다시 돌아오라고 소리쳤다.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하여 길을 돌아 들어가니 자리에 어떤 한 사람이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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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22일
| 高宗 7
| 庚午
출발하려고 할 즈음 본 읍(本邑)의 벗인 전(全), 박(朴) 3~4인이 보러 왔다. 전 형(全兄)은 소록(疏錄)에 들어있는 자이다. 술을 내어 오라고 하여 전별을 하니 감사했다. 아침에 수교(首校)가 보러 와서 일행 상하에게 술을 대접하며 우리들의 밥값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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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1일
| 高宗 7
| 庚午
새벽에 <지명>녹문(鹿門)지명>을 떠나 <지명>오천점(烏川店)지명>에서 점심을 먹었다. 막 길을 출발하려던 즈음에 <인명>덕소(德韶)인명>가 왔으니 어제 <지명>삼교(三郊)지명>에서 서로 길을 나누어 갔던 자로 수위(首位)를 모시고 <지명>우두원(牛頭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