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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18일
| 高宗 7
| 庚午
저녁에 호상(湖上) 영감이 들어오자 온 자리의 사람이 놀라 엎어지듯 나가 맞으며 "무슨 일입니까?"라고 했다. 자리에 앉으며 "이감(梨甘)에서 떠나오는 날 <지명>용산동(龍山洞)지명>에 도착하여, 영남인 중에 판을 불태우라는 관문이 내려가는 것을 본 사람을 만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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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10월 3일
| 高宗 1
| 甲子
| 맑다.
우레가 친 변고에 관한 일로 전교(傳敎)하기를 ……라고 했고, 황원(皇院)의 의계(議啓)도 또한 나왔다. 그러나 모두 허문(虛文)만 갖추었으니 무슨 실제로 경계함이 있겠는가? <인명>중현(仲賢)인명>과 함께 종형의 시지(試紙)를 마름하여 흥동(興洞)측 여관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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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9월 18일
| 高宗 1
| 甲子
| 맑다.
식후에 <인명>중현(仲賢)인명>이 방외로 나갔는데 친구 어떤 사람들이 모두 중국 사신과 과거로 시끄러움이 지난 후에 말하자고 약속하였으므로 만나서 신신당부할 계획이라고 한다. 생각건대 종형주(從兄主)는 혹 오늘 내일 사이에 들어올 것 같으나 오는 중에 탈이 없는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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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9월 24일
| 高宗 1
| 甲子
| 맑다.
듣건대, 대가(大駕)가 대원군의 집으로 거둥하여, 응제(應製)를 설했다고 한다. 【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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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5일
| 高宗 7
| 庚午
| 눈 올 기미가 하늘에 가득하다.
눈 올 기미가 하늘에 가득하여 행장 꾸리는 것을 재촉하여 일찍 출발했다. 오천진에 도착하니 세상을 뒤덮을 듯 눈이 내려 잠깐 사이에 한 치가 쌓여 말발굽이 빠져서 갈 수 없었다. 간신히 <지명>경진(京津)지명>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눈이 그대로 개지 않아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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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26일
| 高宗 7
| 庚午
몇 십리를 가서 또 풍설을 만나 이를 무릅쓰고 가서 강을 건넜다. 조금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고 여점(旅店)은 묵을만한 곳이 없었다. 수위(首位) 어른 행차와 따르는 자 몇 명을 머물게 하고, 나머지는 또 조금 앞으로 3리를 가서 작은 주점을 구해 겨우 들어가 밤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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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7일
| 高宗 7
| 庚午
| 추위가 그치지 않고 바람소리는 조금 잦아들다.
식사 후에 <인명>중현(仲賢)인명>은 수위 어른(首位丈)을 모시고 이르렀다. 여러 행차가 모두 곧바로 큰 길로 나아가서 유곡역(幽谷驛)으로 가서 서로 모인다고 한다. 오후에 <지명>보촌(保村)지명>을 떠났는데, <인명>찬부(贊夫)인명>는 고개 아래서 전송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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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16일
| 高宗 7
| 庚午
<지명>궁안(弓安)지명>을 출발했다. 여러 의론이 성에 들어가는 날에는 저물녘에 들어갈 수 없으니 마죽(馬粥) 교외에 이르러 묵고 내일 강을 건너기로 약속했다. 마죽 교외에 도착하여 한낮에 숙소에 들어가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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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28일
| 高宗 7
| 庚午
추위가 줄곧 풀리지 않아 외축(畏縮)되어 일찍 출발할 수 없었다. 또 <지명>원주(原州)지명>이후로 각기 갈림길에 임하기 때문에 한 곳에 모여 머물며 해를 보내고 맞이한 뒤에 서로 헤어지기로 계획했다. 생각건대 영저(營邸)가 넓이 면에서 편할 것 같이 <지명>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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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23일
| 高宗 7
| 庚午
늦게 출발해서 낮에 <지명>풍기읍(豊基邑)지명>에 들어갔다. 시장이 열려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어서 말이 뚫고 나갈 수 없었다. 잠시 여관에서 쉬었는데, 시끄럽고 떠들썩하여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마침내 <인명>중현(仲賢)인명>과 함께 먼저 길을 떠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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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10일
| 高宗 7
| 庚午
| 바람과 추위가 아주 맹렬하다.
바람과 추위가 아주 맹렬해서 말을 버리고 걸어갔다. 수위 어른(首位丈)은 가마꾼을 세내어 고개를 넘었다. <인명>안보(安保)인명>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어 <지명>수회리(水回里)지명>에 도착했는데, 주점의 모습이 적막했고 인마를 수용할 집이 없어서 보행막(步行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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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21일
| 高宗 7
| 庚午
일찍 일어나 소청으로 갔다. 오늘 설청(設廳)하려 했으나 어제 저녁 일의 기미가 있는 이후로 어떤 거조가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종형제가 함께 이르러 바야흐로 처사를 의논하는 일이 미처 결정되지도 않은 때에 문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좌중 사람들은 이미 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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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18일
| 高宗 7
| 庚午
새벽에 제사를 지냈지만 제사에 참석하지 못했으니, 슬프고 그리운 마음이 더욱 심하였다. 처음에는 오늘 길을 떠나려고 했지만 말의 병이 나아지지 않고 눈길에 통할 수 없으니 감히 뜻을 내지 못하지만 피할 수 없는 행차일 뿐이니 도리어 스스로 조급하고 근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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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11일
| 高宗 7
| 庚午
일찍 출발해서 유주점(有酒店)에 도착했다. 또 눈 맞는 것을 무릅쓰고 가서 월천역(月川驛)에 들어갔다. 점심을 먹고 날씨가 조금 개어 여정에 올랐다. 날이 저문 이후에 대추원(大秋院)에 들어갔다. 지나가는 길에 땔나무가 귀해 이르는 곳마다 따뜻한 방을 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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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25일
| 高宗 7
| 庚午
| 날씨가 춥다.
날씨가 추워서 일찍 출발하지 못했다. 반촌에 머문 지 4~5일 동안 날씨가 조금 풀렸는데 동문에서 출발한 후에 또 연일 날씨가 매우 추웠고 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져 보통이 아니니 탄식스러울 만 했다. 늦어서야 길에 올라 장후원(長後院)에서 점심을 먹고 용담점(龍堂店)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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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1월 3일
| 高宗 8
| 辛未
새벽에 닭이 요란하게 울어 일어났는데 슬프고 그리운 생각이 일어나니 어찌 안정할 수 있겠는가. 20리를 가서 <지명>홍천(洪川)지명>에 당도했다. 숙헌(叔獻)이 거정(居停)에 붙여졌기 때문에 또 계속 머물렀다. 중현(仲賢)과 숙헌은 <인명>김신계(金新溪)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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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1월 13일
| 高宗 8
| 辛未
<지명>금성(金城)지명>의 심부름꾼이 도착하지 않았고, <지명>한양지명>의 심부름꾼은 너무 늦었다. 주관(主官)은 또 반드시 너무 늦어서는 안 된다고 해서 부득이 식사 후에 출발해 보냈다. <인명>창운(昌雲)인명>은 어리석은 사람이니 무사히 갔다 올 수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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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26일
| 高宗 7
| 庚午
새벽에 깨어 일어나 앉으니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이웃의 전염병이 맑게 그쳐서 제사를 행할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 통읍하고 답답했다. 아침에 나와 보니 눈은 쾌청했으나 바람이 차가워 마치 피부가 찢어지는 것 같아 감히 머리도 내밀지 못했다. 마주 대하며 근심하고 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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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19일
| 高宗 7
| 庚午
소수가 계신 곳에서 조례를 행하고 밥을 먹은 뒤에 호 장(湖丈)이 운궁(雲宮)으로 들어갔다. 낮 사이에 이참의(李參議)가 운궁에서 나와 전하는 것 또한 어제 호장이 당한 것과 같았다. 그 내용은 유생들을 속히 내려가도록 명하라는 등의 것이었다. 대저 이 영감의 처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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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2월 2일
| 高宗 7
| 庚午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얼굴에 열이 나고 몸은 추위에 얽혔는데, 눈이 또 심하게 내리니 주인은 길 떠나는 일을 굳게 만류했다. 그러나 병의 기운이 발생하려는 초기여서 오히려 억지로라도 길을 갈 만 했고, 또 하루 눈 내리면 하루는 추운 날씨가 번갈이 이어지는 것이 이번 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