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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1월 6일
| 高宗 20
| 癸未
| 날씨가 맑았으나 추웠음
6일 날씨가 맑았으나 추웠음
도회의 자리가 布政司[감사가 집무하던 관청] 밖에 개설되어 힘써 논의하여 호소문을 올렸다. 曺司는 <지명>法興지명> <인명>李庭鐸인명>, <지명>河回지명> <인명>柳東運인명>, <지명>道洞지명> <인명>安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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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3월 25일
| 高宗 21
| 甲申
| 맑음
25일 맑음
邁久와 台久를 감영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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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8일
| 高宗 20
| 癸未
| 비
8일, 비
英齋에 고을사람들의 모임 자리를 마련하고, 본부[慶州府]에 마을의 청원서[鄕狀]을 드리는 것에 대해 의논했다. 청원서의 우두머리[狀頭]는 <인명>孫永烋인명>, <인명>李在斗인명>, <인명>崔昺壽인명>이었다. 청원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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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1월 8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8일 맑음
일행이 절을 하고 돌아가려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의 의견은 잠시 머물렀다가 한두 사람이 關旨를 가지고 나간다면 도리 상 마땅함을 얻고 굳게 결속함이 오래갈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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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7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7일, 맑음
문중의 여러 사람들이 말을 타거나 걸어서 뱃길로 일제히 나아갔다. 英齋會 회원 백 수십 명이 온통 물의 천지가 되어버린 곳을 건넘에 먼저하고 나중함이 있지 않으니, 사람의 타고난 성품이 같음을 볼 수 있었다. 고을의 선비 27명에게 점심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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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5월 2일
| 高宗 21
| 甲申
| 맑음
5월 2일 맑음
감영에서 내린 帖文이 府尹에게 도착하였으니 상고할 일이다.
본 서원의 舊儒인 <인명>李能章인명>와 新儒인 <인명>李在謙인명> 등 양쪽 편의 옳고 그름은 각자 공초한 것에 있다. 그리고 서원의 자리에서 소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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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1월 9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9일 맑음
關旨가 일찍 나오지 않았다. 뒤에 머물던 유생들이 또 감영에 호소문을 올렸다. 狀頭는 <지명>禮安지명> 儒學 <인명>李中五인명>, <지명>善山지명> 幼學 <인명>金泌東인명>, <지명>安東지명> 幼學 <인명>柳東運인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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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1월 19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19일 맑음
여러 사람의 의견은 望香禮를 지낼 때 저들이 일으킨 소란을 당하여 향례를 빠트리게 되었으니, 앞서 내린 제음에 대하여 부득불 감영에 다시 호소문을 올려야 한다고 했다. 한 사람을 보내기로 하고 能烈이 감영으로 갔다. 狀頭는 <인명>金相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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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29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29일 맑음
저들의 무리 가운데 몇 사람이 서원에 당도하여 공적인 모임을 개설하기 위함이라 일컬었다. 그리고 이른바 有司는 본촌의 <인명>李芝材인명>와 <인명>李鍾壽인명>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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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1월 5일
| 高宗 20
| 癸未
| 날씨가 맑았으나 추웠음
11월 5일 날씨가 맑았으나 추웠음
감영 아래에서 도회를 열었다. 본손은 10명이 참가했다. 고을의 선비로는 <지명>露谷지명>, <지명>杜洞지명>, <지명>楊月지명>, <지명>山岱지명>, <지명>杞溪지명>, <지명>里門지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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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0월 18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18일 맑음
사림에서 관청에 또 공문을 보냈다.
삼가 생각건대, 저희는 연일 조사하는 마당에서 지극히 번거롭다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런데 부득불 다시 진술하게 된 것이 있사온데, 이번 조사보고의 사실 하나하나가 진실로 성주께서 나왔다면 감영의 제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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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2월 12일
| 高宗 21
| 甲申
| 맑음
12일 맑음
牌旨를 발하여 <인명>李在謙인명>, <인명>孫星煥인명>, <인명>辛宗海인명>를 체포하러 將羅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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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9월 2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2일 맑음
어제 <인명>李在謙인명>의 말은 결단코 묻지 않고 둘 수가 없었다. 이미 連名으로 <지명>覺里지명>에 글을 써서 보냈다.
<지명>寧海지명>의 여러 어르신께 말씀을 드립니다. 최근에 일을 함에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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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0월 4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4일 맑음
관청으로부터 都色과 首奴, 그리고 都掌務 등을 붙잡아다가 일의 사실에 대해 심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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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5월 2일
| 高宗 21
| 甲申
| 맑음
5월 2일 맑음
감영에서 내린 帖文이 府尹에게 도착하였으니 상고할 일이다.
본 서원의 舊儒인 <인명>李能章인명>와 新儒인 <인명>李在謙인명> 등 양쪽 편의 옳고 그름은 각자 공초한 것에 있다. 그리고 서원의 자리에서 소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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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1월 6일
| 高宗 20
| 癸未
| 날씨가 맑았으나 추웠음
6일 날씨가 맑았으나 추웠음
도회의 자리가 布政司[감사가 집무하던 관청] 밖에 개설되어 힘써 논의하여 호소문을 올렸다. 曺司는 <지명>法興지명> <인명>李庭鐸인명>, <지명>河回지명> <인명>柳東運인명>, <지명>道洞지명> <인명>安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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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5일
| 高宗 20
| 癸未
|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남
5일,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남
또 뒤따라 한 사람을 (감영으로) 보냈다. 떠난 지 오래되어 감영에서 내린 문보와 제음(題音)이 나왔다. 文報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본 서원은 바로 우리들 선대의 스승이신 <인명>文元公 晦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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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11월 15일
| 高宗 20
| 癸未
| 맑음
15일 맑음
齋任이 장차 향례를 행하려 할 때 저들 무리가 소란을 일으키며 막고 희롱하여 나가려하지 않았다. 향례를 빠트려 관청에 제출할 文報를 작성했다. 두 사람을 보내 오래 기다리게 하고, 겸하여 일전에 퇴자를 맞은 두 차례 감영의 제음이 당도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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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8월 12일
| 高宗 20
| 癸未
| 비
12일, 비
보름에 있을 향례의 자리에서 반드시 저 무리들이 소란을 일으킬 일이 있을 것이기에 재회에서 변화에 대응하는 뜻을 남북의 각 마을에 두루 알려주었다. 저 무리들이 이른바 새로 선임한 재임의 사임을 청하는 문서를 바로 <인명>李珏인명>이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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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5월 4일
| 高宗 21
| 甲申
| 맑음
4일 맑음
또 사림에서 다음과 같은 文報를 올렸다.
삼가 생각건대, 본 서원의 사변이 늘어지면서 지금까지 다행히 우리 성주께서 시비를 명백히 밝히고 사실에 근거하여 감영에 보고할 것이라는 믿음을 품었습니다. 감영에서 돌아온 제음을 받들어보니 토론